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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현재의 ‘반일’, 과거의 ‘친일’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둘러싼 낯선 풍경에 대한 해명

<친일인명사전> 발간 소식을 전하는 언론 보도를 보면서 몇 가지 다른 풍경이 눈앞에서 겹쳤다. 해마다 3월이면 신문 1면을 장식하는 3·1절 기념행사 장면과 독도 문제를 비롯해 이른바 일본의 ‘망언’이 있을 때마다 벌어지는 규탄 집회 장면이었다. 서울시청 앞에서 열리는 3·1절 기념행사는 몇 해 전부터 보수 기독교단체 등이 주도하고 있는데, 신문을 보면 매번 그들 손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펄럭인다. 일본대사관 앞을 무대로 펼쳐지는 일본 망언 규탄 집회에서는 주로 군(軍) 관련 단체들이 산 닭의 목을 비트는 것도 모자라 돼지 멱을 따기도 한다. 이들 셋은 ‘반일’이라는 분모를 공유하는 것처럼 비친다.

그런데 <친일인명사전> 발간 문제 앞에서는 태도가 갈린다. 3·1절에 성조기를 펄럭이는 집단과 일본대사관 앞에서 피의 제전을 벌이는 집단은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한사코 반대했고, 방해했다. 평소 이들을 애국주의로 찬양했던 <동아일보>는 사설 ‘대한민국 정통성 훼손 노린 좌파사관 친일사전’에서 “일방적으로 짜깁기한 ‘친일행적’이 실려 있다”며 “대한민국 정통성, 정체성 구축에 기여한 인사들에겐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형태를 여지없이 드러낸다”고 비난했다. <조선일보>도 ‘대한민국 정통성을 다시 갉아먹은 친일사전 발간대회’라는 사설에서 “아까운 국민 세금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갉아먹는 데 쓰였다”고 성토했다.

이들이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문제 삼는 것은 이들의 ‘반일’에 ‘민족’과 ‘역사’가 뒤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색깔’이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경우 이 사전에 창업주의 이름이 나란히 등재됐다. 이들 신문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천왕을 찬양했고, 사전에 등재된 ‘박정희’를 부활시키려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 신문이 추어올리는 집단들도 박정희를 오랫동안 숭앙해왔다. 일제에 부역한 이들을 ‘반일’의 이름으로 떠받드는 행위는 지독한 정치적 분열증이거나, 아니면 과거의 ‘친일’과 현재의 ‘반일’(나아가 ‘친미’)이 이들 내면에서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과거의 친일과 현재의 반일, 친미는 민족주의 이념과는 하등 무관하다. 이들 모두는 당대의 기득권과, 이를 지키기 위한 기회주의를 은폐한 지배 이데올로기다. 만주군 장교 다카키 마사오와 오카모토 미노루가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가 되어 이순신을 성웅화하는 데 앞장선 것은 그런 면에서 내적으로 일관되다. 21세기에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의 의미도 ‘반일 민족주의’에 있지 않다. 한국 주류 언론이 농단해온 ‘역사적 사실’을 바로세우는 사료적·저널리즘적 가치와, 끝없이 변주돼온 지배 이데올로기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 데에 있다.

※ 이 글은 <한국방송대학보> 1562호(2009-11-16)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