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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발표글

황새울은 ‘법대로’인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 지금 그곳은 그저 땅 이름이 아니다. 봄이면 모를 내고 가을이면 걷이를 하던 황새울 너른 들은 더는 농사짓는 땅이 아니다. 설령 올해 농작이 이뤄진다 해도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그곳은 이미 한국사회 안팎의 모순이 복합적이고도 다층적으로 한 데 응축돼 충돌하는 정치 현장의 이름이며, 교과서에서 보고 배운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새삼 따지고 복기해볼 수 있는 생생한 체험 학습장이기도 하다.

  왜 이곳 주민들은 하루아침에 자신의 논과 밭, 그리고 집에서 내쫓기는 처지가 됐을까? 그것도 불법이 아닌 당당한 법의 이름에 의해서 말이다.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행위가 오히려 불법이 되는 이런 역설적인 상황을 두고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합리적 설명은 무엇일까? 당신들이 하필 그곳에 살고 있었던 게 잘못이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당신들만 희생하면 온 국민이 발 뻗고 잘 수 있다고 할 것인가.

  당사자의 처지에서 보면 대추리에 들어설 것이 미군기지이든 골프장이든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새만금을 보라. 아직 논을 일굴지, 공장 터를 닦을지, 아니면 세계 최대 골프장을 조성할지 결정되지 않았다. 그러고도 물막이 공사는 이미 끝이 났고, 갯일 하던 주민들은 그보다 훨씬 오래 전 그곳을 떠야 했다. 그들이 그곳에 있었다는 것 말고, 그들만 잠자코 있으면 마침내 뭐든 들어설 거라는 것 말고 달리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물론 대추리에는 미군기지가 들어설 것이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지금 바로 곁에 있는 캠프 험프리에 이어붙여 기지를 세 배 가까이 확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추리와 새만금은 원주민들의 뜻을 묻지도 않은 채 그들을 일방적으로 내모는 방식으로 사업을 추진했다는 점과, 사업의 수혜자는 결코 그들이 아니라는 점, 그들에게는 혜택은커녕 외려 영원한 질곡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에서 하나다.

  이런 공통점은 국가가 됐든 자본이 됐든 외세가 됐든, 그네들이 주도하는 사업에서 일관되게 확인되고 있다. 어디에서는 아파트를 지어야 한다며 농사짓던 사람들을 내몰고 논 위에 말뚝을 박는데, 같은 시각 다른 어디에서는 농사지을 땅이 필요하다며 갯일 하던 사람들을 내몰고 바다에 둑을 쌓는다. 농사짓던 사람들에게 아파트는 돌아가지 않고, 갯일 하던 사람들에게 드넓은 땅뙈기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민간기업도 개발대상 토지의 50% 이상을 협의매수하면 나머지 토지의 수용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기업도시법). 국방부가 대추리에서 그러했듯이, 민간기업은 기업도시 사업구역의 땅을 50%만 사들이면 나머지 50%는 땅주인이 팔지 않아도 자신의 땅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법원에 공탁금만 걸어두면 절차는 끝난다. 삼성이, 현대가 ‘합법적’으로 나를 내 땅에서 몰아낼 수 있는 세상인 셈이다.

  재산권은 자유권, 평등권, 행복추구권 등과 함께 헌법이 보장하는 주요 기본권 가운데 하나다. 대한민국 헌법은 재산권과 관련해, 공공의 필요에 의한 재산권의 수용 ․ 사용 또는 제한 및 그에 대한 보상은 법률로써 하되, 정당한 보상을 지급하여야 한다(23조 3)고 규정하고 있다. 물론 이 조항의 기본전제는 모든 국민의 재산권은 보장된다(23조 1)는 것이다. 과연 대한민국은 헌법대로 해왔을까?

  새만금 사업은 그 지역 주민의 재산권을 최대한 보장하려고 했으나, 너무나 중요한 ‘공공의 필요’가 있어서, 하는 수 없이 법률에라도 근거해, 그것도 정당한 보상을 한 다음 사업을 추진한 것인가? 그렇다면 갯벌을 막아서 어디에 쓸지도 정하지 않은 공공의 필요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갯일 해서 자식 대학까지 마치던 이들이 어업권을 내놓은 대가로 보상금을 받은 뒤 막일 하며 하루하루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는 건 비단 그들의 무능 탓일까?

  최근에는 그나마 토지 보상금을 시세에 가깝게 쳐주고, 개발 바람이 불어 시세까지 껑충 뛰면서, 한몫 단단히 챙기는 ‘땅부자’도 있기는 한 모양이다. 이마저 외지인이 많아서 탈이지만 말이다. 피나는 싸움 끝에 세입자나 소작인에게 이사비 정도는 챙겨주는 ‘인정머리’라도 생겨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국민의 재산권을 희생해서라도 반드시 얻어야 하는 ‘공공의 필요’는 도대체 무엇이며, 누가 어떻게 정하는 것인가.

   새만금 사업만이 아니다. 2073 대 1이라는 경쟁률로 당첨된 판교 새도시 분양권은 탈락한 2072명에게도 공공의 필요에 해당하는가. 당첨된 한 명은 공공의 필요를 대변하는 의미있는 수치인가. 판교 새도시를 지으면 집없는 서민에게 집이 생기는가. 기업도시가 만날 골프장 짓고 호텔 짓는 개발인데도 민간기업에게 국민의 재산권을 제한할 국가적 권한을 줄만큼 그 사업은 공익적인가. 그런 초법적 권한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기업도시법은 과연 헌법 정신에 부합하는가.

   민간기업에게 국가 못지않은 권능을 부여한 것은 기업도시법이다. 이렇듯 원주민을 밖으로 내모는 방식의 대단위 사업은 늘 법과 ‘동행’하며 법의 ‘엄호’를 받는다. 대한민국 헌법이 국민의 재산권을 제한할 수 있는 근거를 입법에 두었기에 사업을 벌이기 전에 법을 만드는 건 절차적 필요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업이 공공의 필요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법이 있어도 그 사업을 합헌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업을 뒷받침하는 법이 절차적 필요조건의 전부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해당지역 주민, 특히 이 가운데서도 직접 이해 당사자들과 충분한 협의를 거쳐야 한다. 설령 그 사업이 공공의 필요에 부합하더라도, 공공의 필요에 의해 기본권을 제한받는 이들 역시 엄연한 대한민국의 주인이다. 그들의 주권은 다수의 주권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소수자들의 의견을 어떤 식으로든 반영하려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것 역시 절차적 필요조건이다.

   이해 당사자들과의 협의가 어느 수준까지 충족되어야 하는지 잘라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그동안 이해 당사자들과 제대로 협의를 하지 않은 건 분명하다. 미군에게 토지 사용권을 양도한 미군 공여지는 1967년 한미행정협정이 발효되면서 기지뿐 아니라 기지 밖 주변에도 광범위하게 설정되었다. 그러나 미군에 자신의 땅이 공여된 땅 주인들은 수십년 동안 보상은커녕 공여 사실조차 모르고 지냈다. 아니, 기지 밖에도 공여지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 자체가 최근의 일이다.

   ‘공공의 필요’와 ‘법률적 뒷받침’은 대추리 미군기지 확장 이전 사업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번뜩이는 정당성의 상징이다. 기지 이전 사업은 한-미 동맹 관계의 미래를 좌우할 국익이 걸린 사업(공공의 필요)이라고 정부와 대다수 언론들은 주장한다. 한-미 합의사항은 국민의 최고 대의기관인 국회의 비준을 받았고 특별법도 통과됐다(법률적 뒷받침)는 사실만으로, 보상금을 안 받고 이삿짐도 싸지 않는 주민들은 불법집단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주한미군 (기지)은 대한민국 절대다수 주권자들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는 걸까? 정부와 많은 언론들의 말대로라면 주한미군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해도 좋을 만큼 국민들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셈인데, 그러나 그 이익의 실체를 놓고 우리 사회에는 심각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수많은 시민단체들은 이익은커녕 재앙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대목에서 주한미군과 관련한 우리 사회의 ‘신화 체계’가 변하고 있는 현상을 살펴보는 일은 매우 흥미롭다. “반미 논리로 무장한 범대위가 주민들의 반발을 이끌고 있다.”(조선일보 8일치 사설) 이 신문은 평택 미군기지 확장 이전 반대 투쟁을 벌이는 시민단체들을 ‘반미’라고 몰아붙였다. 정부의 논리도 그와 꼭 같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반미’라는 표현은 과거에 견줘 매우 온건하게 통용된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4년 전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진 뒤 일어난 전국적인 촛불집회를 두고도 대다수 신문들은 ‘반미 집회’라고 불렀다. 물론 한-미 동맹에 미칠 악영향도 깊이 우려했다. 하지만 이건 과거와는 확실히 달라진 양상이다. 10년 전만 해도 반미는 우려의 대상이 아니라 금기의 대상이었다. 자동으로 친북, 용공, 좌경이라는 말과 연결되었으며, 무서운 처벌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반미를 얘기하면서 친북이라고 얘기하는 경우는 드물다. 처벌은 공권력 집행을 방해한 경우에 한하며, 구속영장마저 법원에서 대부분 기각되고 있다. 2004년 말 여당이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려고 했을 때 “보안법이 폐지되면 휴전선은 누가 지키느냐”며 울먹였던 제1야당의 대표조차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휴전선은 누가 지키느냐”고 묻지 않는다. 그저 한-미 동맹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할 따름이다.

   대학교수의 말과 논문 정도나 겨우 문제삼을 뿐 법으로서 실효가 희미해진 보안법보다 주한미군의 대북 안보력이 더 낮기라도 하다는 말인가. 둘을 단순비교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주한미군은 이제 휴전선 가까이에 주둔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후방을 훨씬 중요시한다.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북핵의 위협을 그토록 강조하는 미국의 태도로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다.

   그것은 바로 미국은 주한미군을 더는 대북 안보력으로 국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남한의 군사력이 북한의 그것을 넘어섰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 된 지 오래다. 미국은 이제 중국을 주적으로 삼아, 주한미군을 동아시아의 분쟁에 개입하기 위한 군사력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이른바 ‘전략적 유연성’이다. 한반도가 남북 간의 분쟁이 아닌 다른 분쟁에 휩쓸릴 수 있는 셈이다. 이른바 반미단체들이 평택 주한미군 기지 확장 이전을 재앙처럼 여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주한미군이 대북 안보의 첨병이나 최후 보루로 여겨지던 때와 동아시아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군사력일 때의 ‘공공의 필요’에 대한 판단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달라져야 한다. 새만금에 농지를 만들려는 때와 골프장을 들이려는 때의 ‘공공의 필요’가 달라지는 것과, 판교 새도시가 집없는 서민 대신 시세 차익을 노린 투기꾼들 손에 들어갈 때의 ‘공공의 필요’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변화한 공공의 필요를 따질 기회가 제대로 없었다. 국방부와 미군은 자기들끼리 지도 위에 대추리를 찍어놓고도 외교사항이라는 이유로 협상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국회는 충분한 논의도 거치지 않은 채 특별법을 뚝딱 만들어 통과시켰다. 그러니 해당 주민들과 협의 과정이 절차적 필요조건을 채울 만큼 충분했을 리도 만무하다. 기지 확장 이전에 반대하는 주민들은 국방부가 주최하는 공청회에서 내쫓겼다. 나랏일에 반대하면 큰일 나는 줄 아는 주민들만 울분을 삼키며 자리를 지켰다. ‘절차’는 사실상 그렇게 끝이 났다.

   지금 대추리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양상은 공권력의 정당한 법 집행을 일부 주민들과 반미단체들이 불순한 의도로 무력화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공권력은 하늘에서 떨어진 권력이 아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권력은 헌법상 국민의 기본권(천부인권)이다. 공권력은 국민의 기본권을 수호하는 데 존재의 근거가 있다.

   그렇지 못한 공권력, 나아가 대의권력은 주권자인 국민의 저항권에 의해 제한받는다. 그리하여 200여년 전 멀리 나라밖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일어났고, 40여년 전 이 나라에서는 4․19 혁명이 일어났으며, 20여년 전에는 광주 민주화항쟁이, 그뒤 6․10 민주화 항쟁이 일어난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국민의 저항권’이 명문조항으로 들어있지 않지만, 민주주의 헌법에는 어느 나라에나 기본적으로 내재해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들 혁명과 항쟁은 정당화될 수 없다.

   지금 대추리에서 국민의 기본권은 지켜지고 있는가? 법은 헌법 정신에 부합하고, 사업이 공공의 필요에 부합하는지 충분히 논의되었으며, 당사자들과 협의 과정에서 절차적 필요조건은 충족되었는가? 그런 다음에 군과 경찰의 공권력은 집행되고 있는가? 적어도 이런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만 대한민국은 비로소 인민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외없이 주권을 공유하는 민주공화국(헌법 1조 1)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2006년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