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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발표글

결혼식 축시 두 편

2008년 늦가을과 2009년 봄, 후배들 결혼식에서 축시를 지어 읊은 적이 있다.
두 짝 모두 잘 살고 있다(라고 생각한다).
축시 덕분이다(라고 생각하려니 멋쩍다^^).
아니다.
이 따위 축시를 무릅쓰고 잘 사는 건 오로지 그대들의 개척정신 덕분이다.
뒤에 결혼한 짝이 오늘 결혼 500일이 되었다고 한다.
딴 데 버려두었던 그 때 시 두 편을 찾아 입김을 후후 불어 먼지를 털고 여기에 옮긴다.
액땜이다^^



결혼의 리얼리즘 

솜사탕은 천원이다
열 개 먹어도 배부르지 않다
사랑은 밥 먹여주지 않는다
부득부득 아등바등
사랑한다는 건
경제학이 아니다
800 헥타 파스칼과 1200 헥타 파스칼 사이
비바람 폭풍우 몰아치는
청춘의 기압골을 빠져나와
선남선녀 연적들의 막강 포백 시스템을 헤쳐나와
피붙이 일가붙이들 간섭과 입방아를 뚫고나와
양가(兩家)의 국제외교 고압선 외줄을 타고 건너
그대 둘
기필코 마침내
여기 섰다
만신창이 되어
덕담은 공짜다
만 개를 먹어도 배부르지 않다
진실은 비싸다
하나만 먹어도 입에 쓰다
내게 덕담을 기대 말라
사랑의 증거가 결혼이 아니다
사랑의 침전물이 결혼이다
결혼에는 보증서가 들어 있지 않다
보글보글 찌개 한소끔 끓어오를 때
깨소금 한 숟갈 쳤다
그게 결혼이다
맛은 알아서 내라
결혼은 정박이 아니다
출항이다
귀의가 아니고 유목이다
비바람 폭풍우 몰아치는 기압골과
포백 시스템과
징징 울어대는 고압선보다 명징한
기상예보는 없다
그대들 살아온 열정의 온도만큼
그대들 사랑의 비경제학 크기만큼
그대들 앞날은 암시될 터
그대들 사랑에 존경과 끈기를 담아
항일유격정신으로
프로정신으로
이제 떠나라
이 독설이 끝나자 마자 쏟아질
대책없는 박수소리와 함께




절필선언 


서정시를 쓰겠다던 내 약속은
취소다

주말 도심길은 번잡했고
결혼식장 주변을 둘러친 경찰버스들이
그대 둘을 지키려고 세금 들인 게 아니라는 건
그보다 또렷했다
세상이 어지러우니
내 축의금은
회수 가능성 희박한
망명정부 채권일 뿐
웬만해선 내게 서정을 기대 말라,
라고 나는 지금 쓰고 있다,
라고 말하려다,
나는 잠시 머뭇거린다

세상 모든 결혼이 통속해도
그대들 사랑마저 통속한 게 아니거늘
세상 모든 짝짓기가 애욕이래도
태어나는 생명은 하나하나 주인공이고
생로병사는 하나같이 서정이며
대잇기는 그리하려 대하 서사다,
라고 읊으려니

이건 결혼식 축시는 도통 아니고
첨성대 위에서
견우직녀 다리 놔주는 짓도 아니어서
결혼축시란 애당초
짝짓는 남녀의 정염 불덩이 앞에서
입에도 못 대본
아이스크림 한 조각보다 허망한 것이니
그대 둘 불타는 사랑 앞에서
이 넋두리가 귀에 들리기나 하겠는가

그래도 내가 믿는 것은
결혼 전과 결혼 후는 다른 것이 아니어서
그대 둘 살아온 어제가 훌륭하니
내일도 훌륭하지 못할 까닭 없고
그대 둘 함께 일굴 삶은
우주에 단 하나자 한번뿐인
찬란한 별과 빛이 될 것을
나는 믿는다

이로써 나는 오늘
결혼축시를 다시는 쓰지 않겠다는
공개 절필선언을 하기 위해
책상 앞에서 30분을 허비하였다고 밝히려니,
그대 둘
이제 떠나라
대양으로 뱃머리를 밀어들이듯
이 독설이 끝나기 무섭게 대책없이 쏟아질
하객들의 박수소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