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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죽음, 낯선 물음 죽음은 체험을 통해 익숙해지는 것이 불가능하다. 누구도 경험 삼아 죽어볼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대부분의 죽음은 사회적 경험 과정을 거쳐, 살아 있는 이들에게 익숙한 무엇이 된다. 죽음을 자주 접해서 익숙해지는 게 아니라, 이미 죽음에 대해 우리 사회에 규범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호상입니다”라고 상주와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고인이 그 말에 동의할지 여부는 아무도 모른다. 죽음의 해석은 일종의 배치다. 그 메커니즘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언론 보도다. 지하철 선로에 투신한 사람의 자살 동기는 반드시 몇 가지 범주 중 하나에 배치된다. 신병 비관, 실연, 입시 실패, 생활고, 스트레스…. 그러나 어떤 죽음은 여전히 낯설다. 얼마 전 한강의 소설 를 다시 읽으면서 죽음에 대해..
안철수와 애도의 정치학 열아홉 살 청년 노동자가 지하철역 안전문(스크린도어)과 열차 사이에 끼어 숨졌다. 공기업의 하청업체 노동자였다. 본사 정규직이었다면 참사를 당하지 않았을 거라는 주장은 합리적이다. 그에게는 최소한의 안전을 위한 매뉴얼조차 애초 누릴 수 없는 사치였다. 그의 신분이 곧 ‘사회적 사인’이었음을 그의 유품이 된 사발면은 증명한다. ‘위험의 외주화’는 위험한 노동을 외부로 떠넘기는 자본의 행태뿐 아니라, 외부로 떠넘긴 노동은 위험해질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체제 원리로도 해석해야 옳다. 수많은 이들이 자기 일처럼 슬퍼하고 있다. 우리가 날마다 이용하는 공중시설에서 벌어진 사고라는 점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가 죽임을 당하는 순간과 죽음 직후의 이미지가 너무 낭자하게 연상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지 ..
욕실 청소, 그 특수함에 대하여 -5월8일, 참나무씨의 어떤 하루 가사노동에서의 평등은 다음 두 가지가 달성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성별분업의 폐지. 둘째, 일의 합리적인 분담. 성별분업이란 남성이 해야 할 일과 여성이 해야 할 일을 구분해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은 남성이 해서는 안 될 일과 여성이 해서는 안 될 일을 금기로서 못 박은 것이다. 여기에 노동의 장소가 가부장제의 집 내부로 옮겨지면 다시 남성이 해서는 안 될 일로만 국한되는데, 그것은 애초 가사노동이 여성만의 ‘의무’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여성은 뭐든지 해야 하는 반면, 남성은 예외적으로 해주는 것이고, 내키지 않으면 그마저 안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별분업의 폐지는 (성)평등한 가사노동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하지만 성별분업이 폐지돼도..
학벌 불능 시대의 역설 내가 일하는 신문사는 창간 초기에 서울대 출신 비율이 절반을 넘어, 대한민국 어느 조직보다 쏠림 현상이 심했다. 출신대학을 보지 않고 오직 필기시험으로만 뽑은 결과라는 것이 심각한 아이러니였다. 그러다 여러 종류의 글쓰기와 토론, 면접 등을 입사 전형에 도입한 뒤로 신입기자들의 서울대 출신 비율은 차츰 낮아졌고, 창간 15년이 지날 즈음에는 N분의 1이나 다름없게 되었다.서울대 출신 비율이 줄어든 것을 두고, 어느 선배가 술자리에서 내뱉은 짙은 탄식이 기억난다. “이렇게 수준이 떨어지니 앞으로 큰일이다.” 내가 그 대학 출신이 아니라는 걸 뻔히 알고도 전혀 괘념치 않은 건 서울대 독점은 조직의 수준과 정비례한다는 확고한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학벌 기득권자들이 자원독점에 대한 자기합리화마저 해체하려면 ..
아빠를‘아빠’라 부르지 말아다오~ 나와 딸들 사이에 오가는 언어가 범상치 않음을 알아챈 건 3년 전 이맘때였다. 소설 쓰는 손아람, 둘쨋딸 신소2(신비의 소녀2)와 셋이서 당일치기 나들이를 다녀오는 길이었다. 손아람이 말했다. “형네는 참 특이해요.” 식구끼리는 좀체 쓰지 않는 “고마워”와 “미안해”를 일삼아 쓰더라는 거였다. 우리가 그랬던가.그렇다고 나와 두 딸이 유별나게 내외하는 처지는 아니다. ‘불가근 불가원’이라면 모를까. 신소1(큰딸), 신소2는 나와 합의를 거쳐 얼마 전부터 나를 이름으로 부른다. “아빠! 아차, 영춘!” 아직은 서툴지만, 곧 입에 붙으리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 이 의지적인 행동의 뿌리는 다름 아닌 식구끼리도 서로 민감하게 배려하는 몸에 밴 감수성일 테니까. 그녀들이 “영춘, 미안!” “영춘, 고마워..
“처사님, 글로 성불하세요” 봄날, 법랍 17년 비구니 누님과 나눈 공부·수행 이야기 먼발치로 봐도 낯빛이 환하다. 하기야, 화창한 4월 초 오후 2시 만개한 벚꽃 아래 아닌가. 아니면 몇 해 만에 만나는 혈육이 반가워서일까. 파르라니 깎은 머리에 장삼 자락 팔랑이며 작고 다부진 몸피의 비구니가 재게 다가온다. 파안대소로 드러난 큰 앞니에 봄 햇살이 튕겨 자잘하게 부서진다. 한발치 떨어져서 서로 합장하는데, 산보 나온 이들이 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 순간 표정에 변화를 일으킨다. 그럴 수밖에. 그녀가 대학생이고 내가 고3일 때, 제주도 여행을 떠난 부모 대신 학부모 상담을 하러 학교 언덕길을 오르는 그녀를 교실 창가의 급우가 발견하고는 이렇게 외쳤다. “야, 저기 여자 안영춘이다!” 며칠 전 전화가 왔다. “처사님. 속가로 만행..
이름 부르기 얼마 전 딸들에게 “앞으로 나를 아빠라고 부르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작은딸은 까불대며 “네, 아부지!”라고 받고, 큰딸은 “아빠, 무슨 일 있어?”라고 물었다.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다. 어느 공부모임에서 토론이 격론을 넘어 거의 언어폭력 직전까지 갔는데, 내가 바로 그 사건의 가해자였다. 맥락을 살피면 변명할 여지가 없지 않지만, 나이주의의 혐의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시쳇말로 꼰대질을 한 셈이다. “이제부터 이름으로만 불러다오.” 재미있겠다 싶었는지, 딸들은 선뜻 수락했다. 지금도 불쑥 “아빠”라고 부를 때가 많지만, 곧바로 ‘실수’를 깨닫고는 바로잡는다. “아차, 영춘!”두 딸을 오래전부터 “신소1”(큰딸) “신소2”(작은딸)라고 불러왔다. 둘밖에 안 되는 그녀들 이름을 무시로 바꿔 부르다가..
필리버스터, 그 이후 황교안 국무총리가 애국가를 부르다가 4절에서 막힌다고 해도 그의 애국심을 의심할 일은 아니다. 그가 애국가 4절 완창을 애국심의 출발점으로 강조했고, 애국심을 공직가치의 핵심 기준으로 규정하는 국가공무원법 개정안의 바람잡이 노릇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의 애국심을 의심하는 건 가령 노량진 고시촌에 ‘애국가 잘 불러 공무원 되기’ 특강 같은 게 생겨서 최우수 이수자가 곧바로 애국자로 승인되는 것만큼이나 난센스 아닌가.테러방지법이 북한의 핵실험과 로켓 발사, 이슬람국가(IS)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논증하는 것도 부질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야당 의원들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 소식에 탁자를 내려치며 “어떤 나라에서도 있을 수 없는 기가 막힌 현상”이라고 개탄하고는, 별안간 테러방지법과 경제 살리기의 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