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440) 썸네일형 리스트형 스무 살 베트남 아주머니 베트남 출신 친척 아주머니는 내 큰딸보다 네 살 위였다. 한국 온 지 이태째이던 어느 날 “친정엄마가 아프다”며 왕복 여비에 치료비까지 받아 집을 나선 뒤 소식이 끊겼다. 엄마가 아니라 오매불망하던 연인한테 갔다더라는 얘기는 계절이 두 번 바뀔 때쯤 전해 들었다. 술독에 빠져 건강까지 잃은 동갑내기 친척 아저씨의 절망은 그것대로 가슴 아팠지만, 사랑하는 이를 뒤로하고 말도 통하지 않는 남의 나라 농촌으로 시집온 갓 스무 살 여성의 마음에 동조돼 잠시 비극의 정조에 빠졌다. 벌써 10년이 다 된 얘기다.두 해 전이다. 한국군에게 희생된 베트남 모자(녀) 형상의 ‘베트남 피에타’상 앞에 서서 아주머니를 떠올렸다. 그 연상이 얼마간 민망했던 건, 국적만 빼면 그녀와 조각상의 어머니 사이에 닿는 구석이 없었기 .. 그의 예언이 적중하더라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월간지 의 편집장 노릇을 할 때, 성폭력 피해 생존자 인터뷰를 연재했었다. 연재 제목은 ‘내 몸, 파르헤시아’였다. 성폭력 피해 생존자가 진실을 말할 수 있게 하자는 뜻을 담았다. 그리스어 파르헤시아(parrhesia)는 ‘진실을 말하는 용기’쯤으로 풀이된다. 글감이 글감인지라 200자 원고지 50매씩 지면을 차지하다 보면 매체 이미지에 잿빛이 드리우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주어가 되는 저널리즘을 시도해보고 싶은 생각이 앞섰다.막상 연재를 시작하고 나니 전혀 예상치 못한 데서 사달이 나곤 했다. 이름과 얼굴을 공개한 인터뷰이로부터 제목 속 표현 하나 때문에 거센 항의를 받는가 하면, 당사자만 겨우 식별할 수 있을 만한 사진 속 작은 표지를 프라이버시 .. 기울어진 운동장에 정의는 없다 18년 만의 혹한 기록이 연일 경신되던 며칠 전 출근길, 숨을 헐떡이며 실외 승강장에 막 내려서려는 순간 전동차 문이 스르르 닫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경우 ‘스르르’는 빠르다거나 느리다고 할 수 없는, 다만 염장 지르는 속도의 의태어다. “아, 억울해!” 정시에 출발한 열차에 대고 맥락 없는 탄식이 허연 입김에 섞여 마스크 밖으로 새어 나왔다.‘억울함’이 2018년 벽두를 북극발 한파처럼 뒤덮고 있다. 비정규직 정규직화에서부터 가상통화 규제, 평창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구성에 이르기까지, 억울함으로 충만한 감정은 고공비행하던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마저 하강기류로 빨아들일 태세다. 직접당사자만의 감정에 그치지 않는다. 단일팀 구성으로 성적이나 출전 기회에 변수가 생긴 남쪽 선수는 최대 2.. 신문사는 공장입니다 언제부턴가 나는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 116-25번지를 “공장”이라 부른다. 고급스러운 커피전문점이 ‘팩토리’나 ‘공작소’ 같은 상호를 내걸며 제조업과 노동을 낭만화하는 행태와 유사하게 비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곳은 분명 공장이다. 신문을 찍는 거대한 윤전기가 있고, 8층짜리 신문사 건물은 1, 2층의 윤전실을 토대 삼아 그 위에 서 있다. 무엇보다 그 윤전기를 애써 닦고 조이고 기름칠해 밤낮으로 돌리는 동료 노동자들이 있다. 그들과 더불어 이곳 구성원 대부분은 직군과 상관없이 민주노총 언론노조 한겨레신문지부 조합원이다. 맞다. 언뜻 오천만의 밉상, 온 국민의 욕받이가 돼버린 듯한 바로 그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말이다.이영주 민주노총 사무총장이 지난 18일부터 더불어민주당 대표실을 점거해 단식농성을 .. 조금 다른 수능일은 오지 않았다 포항 지진 여드레 만에 다시 닥친 수능일 아침, 외가와 친가 쪽에서 잇따라 전화를 받은 둘째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시험은 내가 보는데 왜 주변 사람들이 더 난리지?” 그녀의 굼뜬 동작이 마뜩잖았던 나는 순간 뜨끔했다. 시험장 부근에 내려주며 “즐거운 시간 보내”라고 ‘아무 말’ 한마디 뒤통수에 날리고는 곧장 차를 몰았다. 평소보다 잘 뚫리는 길을 달려 여유 있게 신문사에 도착하고서야 직장인 출근 시간이 한 시간 늦춰진 덕을 본 사실을 알아챘다.즐거울 구석이라고는 하나 없는 이 이벤트에 온 나라가 올인하는 날이면 신문도 덩달아 ‘클리셰’에 갇히고 만다. 수험생 부모의 기도하는 두 손과 수험생을 태운 경찰 오토바이 사진은 빠질 수 없는 레퍼토리다. 올해 는 ‘조금’ 달랐다. 이 전국적인 소동을 먼발치.. 조개는 언제 줍나 광화문 캠핑촌은 2016년 11월4일 입주했다. 작은 텐트들이 펼쳐지기 무섭게 경찰이 달려들었다. 경찰 손에 들려 나가는 텐트 안에서 사람들은 “여기 사람 있다”고 아우성쳤다. 텐트를 빼앗긴 이들은 늦가을 밤하늘을 이불 삼아 한뎃잠을 잤다. 다음날 2차 촛불집회가 열리면서 텐트는 다시 들어섰다. 계절이 두 번 바뀌고 마침내 박근혜가 탄핵되고 난 올 3월25일까지, 광장 한 귀퉁이에 텐트 60동이 굴딱지처럼 눌어붙어 있었다. ‘촌민’은 크게 두 부류였다. 시인 송경동, 사진작가 노순택같이 창작할 권리를 침해당한 블랙리스트 문화예술인과 기륭전자의 김소연·유흥희같이 일자리를 빼앗긴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그들은 추위뿐 아니라 차량의 소음과 진동, 매연과도 사투를 벌였다. 새벽에 용변 보러 먼 길을 떠나는 건 더.. ‘쇼미더머니’ 분노학 힙합의 히읗자도 모른다. 자막이 없으면 가사 한 소절 알아듣지 못하는 내겐 다만 속사포 같은 말과 화난 표정, 허세의 몸짓이 힙합이다. 미국 힙합 래퍼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2002)을 보며, 처음엔 래퍼들이 그저 마초로만 여겨졌다. 쇠락한 자동차 도시 디트로이트의 공간적 배경과 빈곤층 청년 에미넴의 생애서사가 차츰 눈에 들어오면서 힙합의 서정은 존재론적인 ‘분노’일 거라고 겨우 짐작했다.요즘 뜻하지 않게 힙합에 자주 ‘노출’된다. 리모컨권을 쥔 동거인들 탓에 깊은 밤 하릴없이 힙합 프로그램 를 지켜본다. 여기에서도 분노와 허세는 쉽게 눈에 띈다. 그런데 과는 자못 다르다. 출연자들은 화난 표정으로 배틀(춤이나 노래 따위를 맞겨루는 일)을 하지만, 심사를 받을 때면 다소곳하기가 흡사 교회 성가대원들이.. ‘노키즈존’에 대한 아재의 위치성 ‘노키즈존’을 내건 레스토랑이나 카페, 심지어 펜션까지 있다는 걸 얼마 전에야 알았다.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논란을 소개하는 기사를 보고 나서였는데, 이 금단의 구역은 이미 몇해 전부터 도처로 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왁자한 술집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내 늦은 퇴근길 동선에서는 좀체 조우할 만한 기회가 없다는 점을 들어, 나는 기자로서 때늦은 정보 습득의 잘못을 스스로 사면했다. ‘사업주의 정당한 권리’니 ‘맘혐’(엄마 혐오)이니, 주고받는 자못 심각한 설전이 과잉논쟁으로 보인 탓이기도 했다.돌이켜보면 과거에도 특정한 공통점이 있는 이들을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곳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음식 거덜 나는 걸 막으려고 고기뷔페 주인이 내걸었던 ‘씨름 선수단 사절’ 글귀는 그 집단에 대한 적대가 아닌 우스개였다. .. 이전 1 ··· 13 14 15 16 17 18 19 ··· 5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