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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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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적, 내일의 적 대통령 선거 얘기를 하지 않는 게 하는 것보다 어려운 시절이 돌아왔다. 자신이 찍은 후보가 당선되는 걸 본 적이 없는 이라면 성가시거나 소외된 시간으로 들어서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냉소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에게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육박해오는 시간일 수 있다. 후보와 그 진영을 이르는 말이 아니다. 내가 알기로 선거에 졌다고 극단적 선택을 하는 후보는 여태 한 명도 없었다. 다들 국민의 현명한 선택 앞에 고개 숙이고, 서둘러 앞날을 다짐했을 뿐이다. 2012년 12월19일, 대선 결과가 나오기 무섭게 노동자 세 명이 목숨을 끊었다. 모두 장기 투쟁 사업장 소속이었다. 스스로 세상을 등진 게 아니라 천 길 벼랑 끝이 발밑에서 무너진 ‘추락사’였다. 애초 그들 앞에 놓인 ‘죽느냐 죽..
‘착함’만 남은 대통령 새해 기자회견 중계를 보고 나서 문재인 대통령한테 받은 인상은 ‘착함’이었다. 처음부터는 아니었다. 지난 한 해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은 갈등 사안들이 그의 반듯한 표현을 거쳐 지당한 것이 되는 걸 볼 때만 해도, 갈등을 회피하거나 관리하려 한다는 느낌 정도였다. 그럼 집권 5년차의 ‘무력감’ 혹은 ‘노회함’쯤으로 봐야 할 텐데, 표상과 실재가 그다지 밀착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착함의 이미지는 문 대통령의 아동 학대 관련 발언에 대한 청와대의 해명을 듣고 나서 한층 또렷해졌다. 그의 표현에 오해 소지가 있었던 건 맞다. 숲을 빼고 나무만 말한 게 컸다. 그러나 그걸 ‘인신매매’에 빗댄 비판은 과할뿐더러 논점에서도 이탈했다. 나는 문 대통령의 ‘말실수’가 피해 아동의 고통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지 못한..
기자 양반, 인생 왜 그렇게 살았소 어느 아랫녘 말씨에다 살아온 세월만큼의 탁성이 내려앉은 남성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다짜고짜 성을 냈다. 다주택자 중과세를 주장한 그날 사설을 따지는 거였다. “서울 사는 자식들 주려고 강남 아파트 두 채 산 게 죄냐. 나 같은 서민이 세금 낼 돈이 어딨냐”고 했다. 세금은 벌금이 아니다, 실거주자인 자식들더러 내게 하시라 했더니 “자식들도 변변한 직업이 없다”고 했다. 그러고는 자기 속을 왜 몰라주느냐는 듯 대뜸 물었다. “기자 양반도 세금 낼 거 아니오?” 전셋집에만 살아 재산세 낸 적이 없다 하니, 이번엔 “청약에서 계속 떨어진 거냐”고 물었다. 마지막 인내심을 쥐어짜 대답했다. 청약저축에 가입해본 적이 없노라고. “아니, 인생을 왜 그렇게 살았소?” 이 질문은 2020년이 저물 때 ‘내가 들은 ..
김진숙의 두 목소리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김 지도) 목소리에는, 메시지와 별개로 듣는 이의 가슴에 긴 사이클의 울림과 초단파의 각성을 동시에 남기는 파장이 있다. 에이엠(AM) 주파수와 에프엠(FM) 주파수의 특성이 한데 어우러진 듯한 형질이다. 2011년 여름 ‘희망버스’ 타고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에 가서 처음 들은 지상 35m 타워크레인 위의 연설은, 분명 사람의 소리를 넘어서는 소리였다. 수없는 망치질과 담금질로 단련된 금속성의 쩡쩡한 울림이 또렷했으나, 그것은 또한 물질의 소리를 아득히 넘어서는 소리였다. 그해 내가 매번 희망버스에 오른 데는 그 소리의 이끎에 몸을 내맡긴 면도 없지 않았다. 그의 몸속에는 목소리와 관련된 비해부학적인 기관이 있을 거라고 지금도 상상한다. 비해부학적이라면 태생적이 아닌 생애사..
‘99’의 쓸모와 쓰임새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는 토머스 에디슨의 말은 숫자 ‘99’에 관한 가장 유명한 어록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면 꽤나 자기도취적인 말이기도 하다. 저 명제는 천재가 아닌 사람으로서는 입증이 불가능하다. 에디슨은 한껏 겸양까지 드러내며 자신을 천재로 내세운 셈이 된다. 에디슨의 명제와 숫자 구성이 똑같기로는 ‘1 대 99 사회’를 들 수 있다. 경제 양극화로 소수 1%가 부를 독점하고 나머지 99%는 소외됐다는 구조 인식 프레임이다. 미국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 등이 대표적인 주창자다. 우리나라에서도 진보 진영에서 대체로 고른 지지를 받아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새해 기자회견에서 1 대 99 사회를 “전세계가 직면한 공통 과제..
스무 살 베트남 아주머니 베트남 출신 친척 아주머니는 내 큰딸보다 네 살 위였다. 한국 온 지 이태째이던 어느 날 “친정엄마가 아프다”며 왕복 여비에 치료비까지 받아 집을 나선 뒤 소식이 끊겼다. 엄마가 아니라 오매불망하던 연인한테 갔다더라는 얘기는 계절이 두 번 바뀔 때쯤 전해 들었다. 술독에 빠져 건강까지 잃은 동갑내기 친척 아저씨의 절망은 그것대로 가슴 아팠지만, 사랑하는 이를 뒤로하고 말도 통하지 않는 남의 나라 농촌으로 시집온 갓 스무 살 여성의 마음에 동조돼 잠시 비극의 정조에 빠졌다. 벌써 10년이 다 된 얘기다.두 해 전이다. 한국군에게 희생된 베트남 모자(녀) 형상의 ‘베트남 피에타’상 앞에 서서 아주머니를 떠올렸다. 그 연상이 얼마간 민망했던 건, 국적만 빼면 그녀와 조각상의 어머니 사이에 닿는 구석이 없었기 ..
깨시민, 비시민, 깨비시민 나는 예술영화 마니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중영화 취향은 더욱 아니다. 일상의 표층에서 보고 듣고 느끼기 어려운 메시지를 담은 영화에 끌리는 편이다. 내 식으로 말하면 ‘불편한 영화’다. 무슨 노릇인지, 지난 주말 집에서 해피엔딩 가족영화를 내려받았다가 초장에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깨어 보니 제목도 줄거리도 기억에 없다. 대신 소소한 깨우침을 얻었다. 불편하지 않은 영화는 잠을 부르고, 안락은 깨어 있음을 방해한다.요즘 부쩍 자주 듣는 ‘깨시민’(깨어 있는 시민)으로 연상작용이 번지더니, 시나브로 나홀로 반대말 놀이에 빠져들었다. 깨시민의 반대말은 ‘잠시민’(잠들어 있는 시민)인가? 글쎄다. 반대말은 맥락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산토끼의 반대말은 집토끼, 들토끼, 죽은 토끼, 판 토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