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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간지’의 뻔뻔함


이명박 대통령 신년사 배경에 도열한 10개의 태극기 
미디어스  안영춘 기자  jona01@mediaus.co.kr  
 
 

▲ 1986년 6월 부산에서 벌어진 시위의 한 장면.


 
애국가 하면 경건함과 장중함을 떠올린다. 그러나 같은 애국가라도 때와 장소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1987년 6·10민주화항쟁 때 시민들이 거리에서 불렀던 애국가와 2006년 독일 월드컵 때 윤도현이 무대 위에서 불렀던 애국가의 차이를 떠올려보면 쉽다. 둘의 차이는 때와 장소의 차이, 그리고 그 선율을 타고 흐르는 맥락의 차이에서 비롯됐다. 그뿐 아니라 윤도현의 애국가는 ‘리메이크’라는 공정을 거치기도 했다.

2004년 3월 국회의 대통령 탄핵 결의안 가결 당시 사지가 들려 본회의장 밖으로 끌려나온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불렀던 애국가를 기억하는가. 그리고 1년(정확히 355일) 뒤 같은 국회 안에서 또다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행정도시특별법’이 여야 합의로 처리됐을 때, 서울과 수도권 한나라당 의원 20여명이 본회의장 단상 앞에서 그 익숙한 노래를 불렀다. 1년의 시차가 있었지만 장소는 같았다. 물론 리메이크도 없었다. 그런데도 하나는 꽤 비감했고, 다른 하나는 제법 희극적이었다. 

2009년 1월2일 오전 10시, 대한민국 국민들은 새해 벽두부터 이명박 대통령의 신년사를 들어야 했다. ‘얼리 버드’는 하루뿐 아니라 한 해의 시작도 빨랐다. 이 대통령도 이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지 “경제 위기 속에서 국정을 어떻게 펴나갈 것인지 단 하루라도 빨리 알려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로 말문을 열었다. 이어 “정부는 지난 연말부터 새해 업무를 (이미) 시작했다. 이제 국회만 도와주면 국민 여러분의 여망인 경제살리기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것”이라며 ‘보조’를 못맞추는 정치권, 특히 야당을 초장부터 겨냥했다.

올해 대통령 신년사의 주제는 ‘4대 국정운영 방향’으로 압축됐다. 그러나 모든 주례사가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의 클리셰를 빠뜨리지 않듯이, 모든 신년사에는 비켜갈 수 없는 플롯이 있기 마련이다. 지난 1년은 늘 적지 않은 ‘개혁적 성과’가 있었으나, 현재는 항상 ‘위기’이고, 그 성과의 방향으로 가일층 일로매진하면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데도, 일부 불평불만하는 자들이 있으나, 내가 솔선수범하며 가족처럼 보듬을 테니, 나를 믿고 따르는 것이 곧 희망일지다…. 주제는 달랐을지언정, 이명박 대통령도 이 화법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 이명박 대통령의 신년사 모습 ⓒ청와대 공식 블로그 ‘푸른 팔작지붕 아래’ 페이지 캡처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신년사 발표에는 전두환도 노태우도 김영삼도 김대중도 노무현도 구사하지 않았던, 새로운 기법이 구사됐다. 신년사 발표 내내 텔레비전 화면 배경을 채운 건 태극기였다. 한 개도 아니고 무려 10개가 도열했다. 클로즈업 화면에서는 늘 2개의 태극기가 그의 어깨 뒤 좌우로 비쳤으며, 롱숏 화면에서는 5개 이상이 한꺼번에 비치기도 했다. 태극기를 이용한 이미지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거기에 ‘10개들이 한 묶음’의 물량공세까지 퍼부었다. 이 표현전략은 무슨 효과를 노린 걸까?

낯설지만 결코 참신하지 않은, ‘생경한 진부함’. 이명박 정부를 관통하는 표현전략을 개념화하면 그렇다. 원단이 촌스러워서 표현전략도 촌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표현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인가와 누가 주요 타깃인가에 따라 ‘촌스러움’은 합목적적으로 선택된다. 텔레비전 광고에서 가장 촌스러운 산업분야가 제약인데, 제약사들이 집단적으로 촌스러워서 그런 게 아니다. 광고를 보고, 즉각적인 반응(자의적 자각 증세와 소비를 통한 완치에의 확신)을 일으키게 하려는 고도의 전략이 숨어 있는 것이다.

태극기도 때와 장소,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가 품속 깊이 숨겨둔 태극기와 2002년 월드컵 때 가수 데뷔를 노리고 응원전에 나선 어느 여성의 탱크탑 태극기의 차이처럼 말이다. 1980년 5·18항쟁 때나 1987년 6·10항쟁 때 나오는 흑백사진의 태극기는 어떤가? 심지어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해 베이징올림픽에서 거꾸로 들었던 태극기와 이날 등 뒤에 도열시킨 태극기도 분명 다른 태극기다. 이건 ‘기표’와 ‘기의’의 관계다. 기표는 하나지만 기의는 수없이 많다. 모든 표현전략은 기표가 아닌 기의에 맞춰져 있다.

이명박 대통령 신년사에서 태극기는 내내 하나의 뚜렷한 ‘간지’로 작동하다가, 마지막 문장에서 정확하게 대상을 지시한다. “위대한 우리 국민은 숱한 위기를 딛고 ‘기적의 역사’를 만들어 왔습니다. 이 역사는 2009년에도 이어질 것입니다. 훗날, 2009년이 대한민국이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켜 선진일류국가로 가는 초석을 닦은 해로 기록되도록 합시다.” 태극기의 기의는 바로 위기극복을 위한 일치단결이다. 그리고 일치단결의 대상은 국민이다. (당신은 지금 아프고, 의심없이 나를 따르면 곧 완치될 수 있다.)

이명박 정부 표현전략의 생경함은 ‘뻔뻔함’에서 나온다. 남들은 낯간지러워 엄두를 못낼 진부한 소품(기호)들을 천연스레 전시한다. 신년사에서는 할머니 3인에 관한 에피소드가 무려 두 단락을 차지한다. 이들은 “밤을 꼬박 새워 2만원 남짓 벌며 하루 세끼를 걱정하면서도 아침마다 나라와 대통령을 위해 기도”하고(가락시장 박부자 할머니), “나라가 어려워지면 말이 많고, 남 탓을 많이 하는데, 다 소용 없고, 각자 위치에서 맡은 일이나 잘 하면 되는”(돼지갈비집 주인 할머니) 이들이다. 대통령은 이들 때문에 콧날이 시큰해지고, 숙연해진다.

▲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해 베이징올림픽 경기장에서 뒤집혀 달린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왼쪽). 귀국한 올림픽 선수단이 서울 광화문에서 행진을 벌일 때 시민들이 들었던 뒤집혀진 태극기는 경찰에 의해 땅에 떨어져 짓밟혔다(오른쪽).

 

태극기는 길잃은 어린양(보조를 못 맞추는 정치권, 특히 야당과 말 많고 남 탓하기 좋아하는 이들)에게 끝없이 귀의처를 알리는 ‘깃대’이자, 가락시장 박부자 할머니와 ‘강부자’ ‘고소영’을 ‘또하나의 가족’의 정체성으로 묶어주는 ‘가훈’이다. 그 깃대와 가훈 아래서, 2009년에는 (원저자인 버락 오바마가 뭐라 생각하든) ‘담대한 도전정신’으로 녹색성장을 위한 4대강 정비사업의 삽질을 시작해야 한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태극기는 10개 정도는 돼야, 아니 다다익선, ‘Ctrl+V’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은 크게 그의 가족(국민)과 비가족(비국민)으로 나뉜다. 그 표현전략이 구리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끝내 대한민국 국민의 정상성을 획득한 일원이 될 수 없다. 맞다, 게보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