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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어느 날 우린 낯선 냉면을 먹게 될 것이다


을지면옥(서울 중구 입정동)은 먹으러 들어갈 때부터가 먹는 과정의 일부인 음식점이다. 공구 가게와 배터리 가게 사이로 난 너비 1.5m의 통로를 지나 상가 뒤편으로 빠져나가면 안채처럼 자리한 건물이 얼굴을 내민다. 을지면옥을 찾아 들어가는 과정은 삼삼함을 지나야 비로소 감칠맛이 열리는 이 집 냉면 맛을 공간적으로 재현한 듯하다. 믿거나 말거나, 단골들은 좁은 통로를 다 지날 무렵 침샘이 서서히 열리는 걸 느낀다.

얼마 전부터 ‘을지면옥’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 가게가 재개발로 사라질 처지라는 보도에, 계절 불문하고 문전성시를 연출하던 미식가들이 너도나도 자판을 두들겨대는 것이리라. 정확히 말하면 을지면옥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옮겨가야 할 처지지만, 레시피를 그대로 옮겨도 맛은 온전히 옮기지 못하는 것이 맛집의 본디 숙명이다.

을지면옥을 보존하려는 시민들의 의지는 우리의 문화 수준이 그만큼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징표인지도 모른다. 노포(오래된 가게)의 문화적 가치를 이처럼 중시하게 된 것은 새롭고 번듯한 외양만 맹종하던 과거 모습과 분명히 다르다. 이제 우리는 막개발 시대와 결별한 것일까. 그러나 을지면옥이 전면으로 불려 나온 모양새는 상가 뒤쪽으로 물러나 있는 이 집 위치, 그 위치를 닮은 냉면 맛과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

사실 청계천·을지로 일대 재개발 사업의 주요 대상은 을지면옥이 아니다. 씨앗을 품듯 을지면옥을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철공소와 공구 가게들이다. ‘청계천 을지로 보존연대’라는 모임은 이 지역 소상공인과 종업원 수가 5만명을 헤아린다고 전한다. 어떤 가게들은 을지면옥보다 훨씬 오래됐고, 60년 넘은 곳도 적지 않다. 이들은 업종과 전문성이 각자 달라 품앗이하듯 함께 물건을 만들어낸다. 소상공인들의 유기체가 거대한 생태계를 이루면서 ‘인공위성도 만들어낸다’는 전설을 낳았다.

그 전설이 사라지고 있다. 가게 수백곳이 이미 지난해 10월 이후 강제철거를 당했고, 버티다 못해 폐업하는 곳도 속출하고 있다. 어디로든 옮겨간다 해도 다른 가게들과 유기적 관계가 끊어지면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생존의 벼랑 끝에 몰린 이들에게 우리 사회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을지면옥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뒤로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 자리에 고층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설 거라는 사실은 을지면옥만 도드라지고 저 많은 가게들이 가시화되지 않는 사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다. 우리는 식도락을 비롯한 문화적 취향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행동에 나설 태세가 돼 있다. 그러나 그 취향이 침해되지 않는 한 강제철거를 외면할 것이고, 어느 경우 침해돼도 용인할 것이다.

우리는 10년 전 불탄 용산 남일당 폐허 위로 쑥쑥 올라가고 있는 주상복합건물을 욕망한다. 20여년 전 무너진 삼풍백화점 터는 이미 마천루 주거시설로 바뀌어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죽음은 이 두곳에서 은유가 아니라 실제였다. 을지면옥 실검 등재는 부동산, 맛집, 목숨의 위계를 서열순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청계천·을지로 재개발 사업을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 위계의 순위가 바뀌지 않는 한 그곳 소상공인들의 생존권은 서울시의 능력과 의지 밖의 문제로 남을 것이다. 을지면옥은 주상복합건물 안쪽 한곳에 실험실 동물처럼 기이하게 보존 처리될 공산이 크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는 철거·재개발업자, 전직 서울경찰청장 옆 식탁에 우연히 앉아 맛의 과정이 소거된 낯선 냉면을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 <한겨레> ‘아침 햇발’에 실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