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발표글

그의 예언이 적중하더라도

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열린 검사 성폭력사건 진상 규명 촉구 기자회견에서 한 참가자가 성폭력 고발 운동인 미투(Me Too) 캠페인의 상징인 하얀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월간지 <나·들>의 편집장 노릇을 할 때, 성폭력 피해 생존자 인터뷰를 연재했었다. 연재 제목은 ‘내 몸, 파르헤시아’였다. 성폭력 피해 생존자가 진실을 말할 수 있게 하자는 뜻을 담았다. 그리스어 파르헤시아(parrhesia)는 ‘진실을 말하는 용기’쯤으로 풀이된다. 글감이 글감인지라 200자 원고지 50매씩 지면을 차지하다 보면 매체 이미지에 잿빛이 드리우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주어가 되는 저널리즘을 시도해보고 싶은 생각이 앞섰다.

막상 연재를 시작하고 나니 전혀 예상치 못한 데서 사달이 나곤 했다. 이름과 얼굴을 공개한 인터뷰이로부터 제목 속 표현 하나 때문에 거센 항의를 받는가 하면, 당사자만 겨우 식별할 수 있을 만한 사진 속 작은 표지를 프라이버시 노출이라고 문제 삼는 바람에 책을 전량 회수하는 일을 겪기도 했다.

처음엔 이쪽의 선의를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은 인터뷰이들이 야속했다. 그러나 의도와 결과가 번번이 미끄러진 것은 인터뷰이 탓도, 필자 탓도 아니었다. 귀책 사유는 오롯이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에 대해 무지했던 편집진에 있었다. 문제 되는 부분이 매번 달랐던 이유도 거기 있었다. 살아온 삶이나 폭력 피해 양태가 제가끔이니 고통의 형상도 통각의 지점도 모두 다를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들은 까탈을 부린 게 아니라, 특정한 지점에서 특정한 자극과 맞닥뜨려 비명을 터뜨린 것이었다.

그들을 ‘생존자’라 부르는 건 성폭력 당시 살해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기호는 ‘사건 이후’를 가리킨다. 성폭력으로 살해되는 건 피해자의 인격과 일상이다. 피해자는 자신이 당한 일을 붙들고 고립무원 상태에서 해석 투쟁을 벌인다. 자책과 모멸의 전도된 시간을 어렵게 통과해도, 가해자 중심으로 물샐틈없이 짜인 거대한 사회구조에 다시 부딪힌다. 자신의 인격과 일상을 소생시키려는 과정은 한치 과장 없는 ‘사투’다. 그렇게 끝끝내 살아남아 진실을 증언한다. 인터뷰 글은 하나같이 현재진행형의 생존 서사였다. 잿빛이 아닌 핏빛이었다.

매체가 발행되는 동안 연재를 포기하지 않은 건 내 의지가 아니었던 것 같다. 진실의 증언들이 이끌었고, 하나둘 연쇄의 사슬을 이뤘다. 종간 뒤에도 어디에서든 연재가 이어졌다면 사슬을 넘어 관계의 그물로까지 나아가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그렇더라도 나는 젠더적 무지에서 조금밖에 더 벗어나지 못했을 테지만. 연재를 하는 동안에도 다르지 않았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희부옇게 눈에 차오르는 정도였다. 개중 확연히 알게 된 것은 강자인 나는 생존자의 고통을 끝내 몸으로 알 수 없고, 다만 공감의 자세를 수시로 고쳐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투 운동은 별안간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이 사태는 우리 사회가 성폭력의 지뢰밭이라는 사실을 연쇄폭발을 통해 입증할 뿐, 생존자의 진실 말하기는 한순간도 중단된 적이 없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진실 말하기가 미투 운동의 원형임을 보여준다.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증언 활동을 누군가 배후에서 기획했다거나 음모에 이용될 것이라고 보는 건 일본 우파의 관점이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혹시라도 미투 운동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고 이 운동의 미래를 예언하는 이가 있다면 이렇게 귀엣말을 들려주고 싶다.

설령 당신의 예언이 적중하더라도 생존자들이 말하는 진실은 달라지거나 훼손되지 않는다고. 당신에게 당장 시급한 건 공감능력이 바닥난 젠더적 몽매 상태를 자각하는 거라고.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34133.html#csidx16feaa74484243a92ce1991c59e1db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