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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스무 살 베트남 아주머니

베트남 출신 친척 아주머니는 내 큰딸보다 네 살 위였다. 한국 온 지 이태째이던 어느 날 “친정엄마가 아프다”며 왕복 여비에 치료비까지 받아 집을 나선 뒤 소식이 끊겼다. 엄마가 아니라 오매불망하던 연인한테 갔다더라는 얘기는 계절이 두 번 바뀔 때쯤 전해 들었다. 술독에 빠져 건강까지 잃은 동갑내기 친척 아저씨의 절망은 그것대로 가슴 아팠지만, 사랑하는 이를 뒤로하고 말도 통하지 않는 남의 나라 농촌으로 시집온 갓 스무 살 여성의 마음에 동조돼 잠시 비극의 정조에 빠졌다. 벌써 10년이 다 된 얘기다.

두 해 전이다. 한국군에게 희생된 베트남 모자(녀) 형상의 ‘베트남 피에타’상 앞에 서서 아주머니를 떠올렸다. 그 연상이 얼마간 민망했던 건, 국적만 빼면 그녀와 조각상의 어머니 사이에 닿는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얼굴도 닮지 않았고, 나이대도 달랐다. 그녀는 베트남전쟁을 겪은 세대도 아닌데다, 피해자보다는 오히려 가해자 쪽에 가까웠다. 찬찬히 살펴보니 조각상의 어머니는 아예 베트남 사람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곁에 나란히 놓인 ‘평화의 소녀’상과 한 종족 같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전태일의 영정을 품은 어머니 이소선과 겹쳐 보이기도 했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사과하고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상징물인 ‘베트남 피에타’(왼쪽). 이 조각상은 아기를 안고 자장가를 부르는 엄마의 형상인데, 주한 일본대사관 맞은편 ‘평화의 소녀상’(오른쪽)을 제작한 김서경·김운성 부부 작가의 작품이다. 강재훈 선임기자


내 연상감각이 정상 작동했다는 걸 알게 된 건 반년쯤 뒤였다.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17년째 증언해오던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가 월남전참전자회로부터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고소된 사건을 취재하던 중이었다. “아베가 소녀상 때문에 고초를 겪는 거야 그럴 만하다지만, 우리가 무슨 강간을 했다고 피에타상이야?” 참전자회 인사의 거칠고 새된 이 말은 구 이사를 17년 만에야 고소한 속사정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과 베트남 피해 여성의 이미지가 연결되자 전에 없는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소녀상과 피에타상의 높은 싱크로율은 작가(김서경·김운성 부부)가 같아서만은 아니다. 두 작품은 한자리에 놓이는 순간 보편적인 진실을 재현해냈다. 전쟁과 식민의 역사에서 여성과 아이로 대표되는 사회적 약자는 늘 피해자였다. 죽임당하고 강간당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이 베트남 민간인 피해자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보편적 진실을 서로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피에타상에서 이소선-전태일 모자 사진을 떠올린 것도 양쪽의 구도가 닮아서만은 아니다. 학살과 강간을 모면한 약자의 피붙이는 훗날 가해국의 노동자, 신부가 된다.

한국 결혼이주여성의 사회적 위상은 10년 전과 같지 않다. 자주적인 커뮤니티를 형성하며 나름 사회적인 입지를 다져간다. 하지만 사회의 중심으로 향해가는 흐름까지 짚이지는 않는다. 대다수는 여전히 주변부 궤도를 공전하며 차별과 냉대를 겪고 산다. 매매혼 성격이 있다고 보는 일부의 싸늘한 눈길도 그들의 한국 사회 편입을 가로막는 한 요인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상이 전쟁 이후로 이어지는 이유가 가해자의 변하지 않는 태도 탓임을 짚는 경우는 흔치 않다. 여기서 ‘베트남’은 특정 국가 이름이 아니라 한국 사회 주류의 시각이 투사된 타자의 이름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해 과거사에 대해 사과했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세 번째다. 베트남에 사과한 대통령과 사과하지 않은 대통령은 국내에서 민주적인 대통령과 비(반)민주적인 대통령의 분류표에 그대로 재배치할 수 있다. 다만 이번에도 표현이 구체적이지 않은 건 아쉽다. 일본도 한국에 모호하게 사과한 적은 있다. 지금 일본은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고, 참전자회는 피에타상 철거를 요구한다. 혹 10년 전 내 아주머니는 철거됐던 게 아닐까.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38105.html#csidx107cd1b655ac953b578a6075602603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