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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강용석의 악담은 남의 일이 아니다

몰락한 악당이 쏜 총알의 파편에 맞고도 모르는 자들

@unheim(진중권): 이 사건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은, 진보 진영도 강용석처럼 막 나가다가는 똑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는 무서운 사실입니다.

@GoEuntae(고은태): 박 시장의 무고함이 밝혀져서 잘된 일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선 말도 안 되는 의혹에 대해 결국 의혹 제기자가 요구하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다는 걸 보여준 패배입니다. 가해자는? 우리 모두죠.

저격수 강용석의 총구가 강용석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는, 수다기계(트위터)에 올라온 어느 진술(@presidentyskim)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선적인 해석에 그치고 있다. 그는 자신만 쏜 게 아니었다. 그의 총알은 전방위로 향하는 산탄이었다. 특이한 것은 그가 쏜 총알을 맞고도 피격 사실을 자각하는 이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정작 박원순은 피격되지 않았다.)

‘여성 아나운서 비하’ 발언은 세월이 흘러 ‘<나꼼수> 코피’ 사태에서 기시감으로 귀환했다. “여성 아나운서는 모든 걸 다 줘야 한다”는 시정의 언어와 “생물학적 완성도에 감탄”했다는 과학주의적 표현은 얼핏 격이 다르지만, 후자의 드높은 언격(言格)이란 여성에 대한 남성 지식인 부르주아지의 우생학적 이데올로기와 다를 바 없다. 그럼 강용석이 타임머신을 타고 와서 저격한 건 <나꼼수>인가. 당신이 남성이라면 혹 통증이 와야 하지 않을까.

박원순 아들 병역 의혹 사건의 경우, 그는 잘못된 증거에 기반한 추론으로 정치적 가사 상태에 빠지고 말았지만, 진중권(@unheim)의 말대로 6분의 1 확률의 주사위에 올인한 셈이다. 사실의 개연성에 의지적 확신이 결합된 것이라면, ‘에리카 김의 눈 찢어진 아이’ 의혹 제기보다 문제적이라고 할 만한 근거를 찾기 어렵다. 오히려 (두 달 남은) 의원직까지 건 것은 ‘쫄지마 씨바’의 산상수훈을 좇은 ‘돌격 앞으로’가 아닌가. 그런데 육박해오는 그를 보고 아무도 쫄지 않는 건 왜일까.

강용석의 무통 저격술은 다른 우파 논객의 계보도에 쉽게 포섭되지 않는 그의 고유함에 닿아 있다. 1990년대의 박홍은 레드콤플렉스의 사제였을 뿐, 강용석처럼 실재를 둘러싼 진위 쟁투를 벌이지는 않았다. 조갑제는 기의의 부박함에 비해 지나치게 근엄한 아이콘이라는 점에서 강용석과 견줄 바가 못 된다. 강용석은 ‘화성인’ ‘찌질이’ ‘예능 늦둥이’를 자처한다(@Kang_yongseok). 외계인 계보상, 강용석이 화성인이면 변희재는 금성인이다. 슬랩스틱과 부조리극의 차이랄까.

실제 당한 사람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의 저격은 보는 이의 웃음을 자아낸다. 실소와는 질감이 다른 웃음이다. 트위터에는 “‘빅웃음’ 주셔서 감사하다”라는 진술이 오른다. 사이즈 차이만도 아니다. 그가 웃음을 파생하는 맥락은 단순하지 않다. 이를테면 그는 개그맨 최효종을 고소해 스스로를 조롱함으로써, 최효종이 정치·시사 풍자 1인자의 반열에 오르는 데 도약대 구실을 했다.

희극배우는 자신을 징벌의 대상으로 변형시켜야 하는 ‘자살특공대’적 운명을 갖고 있다(앙리 베르그송). 물론 그 목적은 웃음을 매개로 세상을 징벌하는 데 있다. 강용석의 경우 웃음은 매개가 아니라 결과라는 것이 결정적 차이다. 어원적 의미로서 그의 페르소나(가면)는 이미 벗으려야 벗을 수 없게 된 <스파이더맨 3>의 악마적인 검은 가면을 닮아버린 듯하다.

하지만 나는 강용석 못지않게, 그가 난사한 웃음의 총알에 아무런 자각증상도 느끼지 못하는 그의 정치적 상대 진영도 문제라고 본다. 진중권과 고은태(@GoEuntae)의 진술은 그런 배경을 채워넣어야 온전히 읽힌다.

※ <한겨레21>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