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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불경 좀 더 읽으쇼!

※ 얼마전 공장 안에서 선거가 있었다. 경선으로 치러진 이 선거에서 한 후보자가 홍보물에 글을 써달라고 해서 고사 끝에 쓰고 말았다. 그 후보자는 넉넉한 스코어로 낙선했다. 그 결과에 상관 없이, 아니 오히려 낙선했기에 나는 이 글을 오래 기억하고자 한다. 그가 선거에서 했던 발언은 이 공장에서 두고두고 환기하게 될 경고라고 믿기에.


내 주소득원이 실업급여이던 시절이니, 2006년 하고도 여름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난 ‘여름 추위’를 타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바깥세상은 천체 운행과 상관없이 내게 맵찼으니까. 그의 소식은 선경에 든 신선에게나 어울릴 법하게, 무려 바람에 실려 오곤 했다. 바람의 진원지를 찾아 버스에 올랐다. 그는 월정사에서 절밥으로 먹고살고 있었다.

선문답 따위는 애당초 기대하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막연히, 백면서생인 내게 귀동냥할 만한 호구지책을 들려줄 것 같아서였다. 십몇 년 동안 한 번도 같이 일해본 적이 없었지만, 내가 아는 한 그는 기자직이면서도 매체/사업 기획부터 제작/실행까지, 공덕동 공장에서 가장 다양하게, 갖은 일을 다해본 사람이었다. 그 넓은 오지랖에서 뭐라도 건지고 싶었다.

몇 해 만인데, 간밤에 함께 술 마시고 다음날 담배 사러 가다 동네 어귀에서 다시 마주친 사람처럼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는 할 일이 있다며 나더러 혼자 비로봉에나 다녀오라고 했다. 여름해가 뉘엿할 무렵 기진맥진 월정사로 돌아왔는데도 그는 한동안 제 할 일만 하다, 생각났다는 듯 문득, 왜 찾아왔는지 물었다. 까칠하기로 둘째가라면 서글픈 성격을 하릴없이 누르고, 내가 구사할 수 있는 가장 곰살맞은 말투로 구상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그가 말을 끊었다. (본디 그런 인간이다.)
“나 같은 육두품이면 몰라도 너 같은 진골은 그런 일 못한다.”
육두품과 진골!
공덕동 공장에서 궂은 일 안 가리고 해왔다는 자의식에 차 있던 내가 진골이라니…. 그러나 과장되긴 했어도, 지난 시간 그와 나의 개별적이면서 동시에 상대적인 총체성이 그 안에 응축돼 있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나는 진골이었다. 상갓집 개가 될 수 있을지언정 부엌일은 절대 할 수 없는 ‘신분’. 그래도 응수했다. 과장법은 그의 증류되지 못한 피해의식, 길을 찾지 못한 권력감정의 배설방식일 터였다. 설령 그 비중이 미미할지라도.

“불경 좀 더 읽으시죠.”
선문답인지 동문서답인지, 답이 돌아왔다.
“나가자.”

우리는 산문 밖으로 나와 국밥을 먹은 다음 그의 차를 타고 서울로 왔다. 그가 주로 얘기하고 나는 주로 들었다. 운전도 그가 아니라 그의 말이 하는 것 같았다. 그의 화법은 구조화된 역피라미드가 아니었고, 차라리 부조리극의 플롯에 가까웠다. (그의 화법에 익숙해지는 데는 그 뒤로도 제법 긴 시간이 필요했다.) 때로 앞뒤가 모순되게 들리기도 했지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화제들은 가늘지만 촘촘한 거미줄처럼 맥락으로 이어져 있었다. 고속도로를 놔두고 국도로 돌아돌아 오니 새벽이었다. 그 사이 우리 대화는 한 편의 큰 조감도로 그려져 있었다.

그에겐 일정에 없던 서울행이었다. 그날 이후 내 삶에 변곡점이 나타날 때마다, 다시 말해 아쉬울 때마다, 나는 그를 찾았다. 그때마다 그는 일정에 없던 긴 시간을 내주었다. 그는 늘 길게 이야기했다. 화법은 바뀌지 않았다. 나도 육두품이 된 건 아니었다.

*

기억을 더듬을 필요도 없다. 불과 며칠 전이었으니까. 그는 늦은 출마 선언을 하고도 매체 외주 공모 기획 작업 같은 일들을 손에서 내려놓지 않은 채, 매일 야근을 했다. (사실, 그의 일하는 방식은 말하는 방식과 정확히 닮았다. 여러 일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한다.) 지난 3일 낮이었다. 출판미디어국으로 들어서더니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몇 장짜리 A4지 서류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서울시에서 발간하는 어린이신문 외주 공모 안내문이었다. 함께 제안서와 시안 작업을 하자고 했다. 안내문이 우리 손에 넘어온 게 너무 늦어 마감일은 촉박한데, 준비해야 할 것은 산더미 같았다. 더구나 마감일은 선거일과 겹쳤다. 내 일정도 2월호 마감과 겹쳤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해보였다.

나는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짓고, 불가능한 이유를 열 가지도 넘게 들었다. 물론, 그 중에는 “선거를 어떻게 치르려고 그러느냐”는 지청구도 포함돼 있었다.
“선거는 선거고. 이건 한겨레에 큰 도움이 될 사업이야.” (출마 뒤 그의 장광설이 조금 줄긴 했다.)
그가 빠르게 역할을 나눴고, 일정을 시분할로 구성했다. 나는 콘텐츠 기획과 기사 작성을 어떻게 할지 방안을 찾아내기로 했다. 콘텐츠 준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콘텐츠가 준비돼있는 사람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고 정해진 일정대로 기획과 기사가 나올 수 있을지 타진했다.

기획안 정도는 잡아줄 수 있다는 사람을 겨우 찾아냈다. 기획안만 있어도 자료 찾고 기사 쓰는 것은 어떻게든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일정이었다. 그쪽의 일정과 우리 쪽 일정을 아무리 쥐어짜 봐도 이틀의 간극을 메울 길이 없었다. 국장과 함께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댔다. 몇 가지 확인된 조건을 놓고 짧게 몇 마디 의견을 나눴다. 불과 몇 분 만에 만장일치로 ‘포기’를 결정했다. 그가 끝으로 말을 보탰다.
“내년에는 꼭 하는 겁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로 흩어져 다시 제 일에 매달렸다.

덧붙이자면, 나는 이런 식으로 여러 차례 고스트 라이터 노릇을 했다. 물론, 그의 강요와 으름장, 읍소, 그리고 ‘한겨레에서는 누군가 꼭 해야 할 일’이라는 자해적 공명심 부추기기가 매번 있었다. 유령과 싸우지 않겠다고 했던가. 그럼 앞으로 나(고스트 라이터)를 더는 괴롭히지 않겠다는 것인가. 처음으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린다.

*

지난해였다. 그리 오래전도 아닌데, 계절이 헷갈린다. 자정쯤 퇴근해 버스를 타고 신촌을 지나고 있었다. 디지털뉴스부장 이재성이 전화를 해왔다. 어디냐고 하기에 버스 타고 퇴근 중이라고 했다. 그러면 포기할 줄 알았다. 그런데 어디쯤 지나느냐고 다시 물어왔다. 신촌이라고 했다. 회사 앞쯤에서 전화를 걸었을 거라고 짐작한 것이 잘못이었다.
“잘됐네. 우리 홍대 앞 상상마당 근천데, 빨리 와요.”
‘우리’가 누구일지 궁금해 하며 다음 두 번째 정거장에서 내려 걸었다. 더러 알고 더러 모르는 디지털미디어국 후배들이었다. 이미 불콰해진 그들과 자리를 옮겨 마주앉았다. 몇 마디 수작 섞인 덕담이 오간 뒤, 누군가 불쑥 그에 대해 물어왔다. 순간 머릿속에 ‘점령군’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가 이태 전 디지털미디어국에서 일할 때, 그와 관련한 잡음을 이미 들었던 터였다.

이럴 땐 인트로(도입부)가 가장 중요한 법이다.
“이런저런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는데, 왜 불신이 그렇게 깊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날 처음 보는 이였는데, 싸늘하게 말을 끊었다.
“알겠는데요. 이제 말씀 그만하시죠.”
다소 충격적인 반응을 접하자, 세상에는 두 명의 그가 있고, 나는 그 중 한 쪽만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 뒤 우연히 들었거나 내처 캐물어 들은 그의 ‘패악질’에 대해 그에게 확인을 해보곤 했다. 그런데 대부분 그도 들어서 알고 있는 이야기였고, 그의 해명도 내겐 설득력 있게 들렸다. 일부 사실관계가 서로 어긋나는 것도 있었다.

이 말을 꺼내는 것은 지금도 조심스럽다. 다만 짐작컨대, 그의 화법이 불신의 원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또한 육두품도 다 같은 육두품이 아니라는 걸, 육두품으로 살아온 그는 잘 모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편하게 얘기했지만, 하급직원에게는 불편하게, 심지어 불안하게 다가왔을 수도 있다. 상처의 객관성은 상처받았다고 여기는 자의 주관성에 의해 구성된다. 더구나 그는 몽타주마저 범죄형이 아닌가. 고백하자면, 나도 뜻없이 후배에게 던진 말을 기억도 못하고 있다가, 어느 날 그 후배가 눈이 충혈되면서까지 따져 물어 무릎 꿇고(비유법이 아니다) 사과한 적이 있다. 글의 공장에서 말은 때로 글보다 무섭다.

이번 선거가 양쪽 사이에 소통의 물꼬가 다시 트이는 공간이었으면 싶다. 그리고 그에게는 거듭 불경 읽기를 권하고 싶다. 누구 말마따나, 둘 다 한겨레를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다.

*

그는 과연 좋은 조합장 ‘깜’일까. 그걸 증명하는 것은 온전히 그의 몫이다. 이 글이 굳이 추천사 비슷한 것이라면, 에피소드 하나만 보태련다.

그의 공식학력은 고퇴이지만, 그는 대학 몇 군데에 적을 건 적이 있었고, 방송대에서는 서울지역 총학생회장까지 했다. 십수 년 전 서울지역 총학생회에 취재를 갔을 때였다. 보는 사람마다 그의 이름을 꺼냈다. 학교 당국을 상대로 학생회 위상을 높이 끌어올렸고, 그야말로 학교 육두품 노동자들의 처우도 크게 개선했다고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이름이 바람을 타고 전해지기에 그다지 벅찬 세월이 흐른 건 아니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몇 해 전 나는 호구지책으로 방송대학보사에 가서 두어 차례 학생기자들을 가르쳤고, 지금까지도 글을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도 그에 대해 물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그를 학보사 기자들이 생활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해준 사람으로 전해들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유령과 싸우지 않겠다’는 그의 말에서 묵직한 무게감을 느낀다.

*

참, 그의 이름은 육두품이 아니다.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