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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천문학적 복지 논쟁의 깨알 같은 진실

복지 논쟁의 익숙한 구도는 ‘여-야’ 또는 ‘보수-진보’의 대립이다. 그러나 최근의 대립 양상이 ‘정부-여·야’의 구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먼저 공세에 나선 건 기획재정부였다.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이 내놓은 총선 복지 공약들을 따져보니 연간 43조~67조원이 들어가고, 5년간 최대 340조원 규모로 늘어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에 두 정당은 사실상 공동전선을 폈다. 나라 예산은 정치적 의지가 반영되는 것이라는 원론적 주장에 이어, 민생을 파탄시킨 현 정부가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라는 정치 공세가 더해졌다.

여당 소속 서울시장의 사퇴로까지 이어진 지난해 사태와 견주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새누리당은 극적인 변신을 꾀함으로써 복지가 오늘의 대세임을 방증하고 있다. 그러나 서구의 복지 확대 과정을 참고하면 새누리당의 변신도 놀랄 일만은 아니다. 복지는 특수한 정치적 상황에 놓인 보수 정당의 결단에 의해 급진적으로 확대되곤 했다. 나라살림이 곧 거덜 날 것처럼 떠드는 현 정부의 표면적 논리는 오히려 20세기 말 영국 신노동당 정부의 ‘워크페어’(일하는 것을 조건으로 공적 부조를 제공하는 정책)에 가까워 보인다.

이번 논쟁과 관련해 언론 보도 태도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오늘날 한국 지상파 3사의 남루한 위상을 확인하고 싶거든 그날 3사 메인뉴스의 큐시트와 동영상을 비교해보라. 앵커 오프닝 코멘트와 첫 리포트는 하나같이 재정부 발표를 그대로 옮기는 것이었다. 심지어 재정부 차관의 말을 인용한 부분은 3사가 똑같았고, 외부 전문가 인터뷰는 2개사가 겹쳤다. 이에 견줘, 보수 일간지들의 보도 크기나 지면 배치를 보면 ‘정부’와 ‘여·야’ 사이에서 제가끔 교묘히 외줄을 타고 있다. 그나마 대세를 살피는 영민함을 잃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쉽게 흘려 넘길 수 없는 대목이 있다. 정부가 천문학적인 수치로 우주 발사체에나 어울릴 법한 포문을 여는 바람에 이명박 정부의 4대강 파괴에 들어간 천문학적인 비용을 상기시키고 말았지만, ‘모피아’(‘재정부’와 ‘마피아’의 합성어)에게도 나름의 우국충정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정부의 수치가 과장됐을지언정, 복지를 확대하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 돈은 어디에서 나와야 하는가. 여·야는 모두 재정을 절감해 충당하겠다고 되뇌지만, 긴축 재정과 복지 확대는 그 자체로 모순관계에 놓인다.

복지 확대에 앞서 조세 제도 등 소득 재분배 강화를 위한 제도 개혁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모처럼 여·야가 한목소리를 내고 보수 신문도 거부하지 않는 복지 확대 공약이야말로 정작 제도 개혁을 막고 부의 양극화를 영속시키기 위한 교묘한 주술에 불과할 뿐이다.

※ <한국방송대학보>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