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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건드릴수록 위험한 ‘나꼼수’

‘나는 꼼수다’(‘나꼼수’)가 급기야 세계적 권위지 <뉴욕타임스>의 1면 머리기사를 장식했다. 조회수가 1천만 건을 넘는 세계 1위의 팟캐스트라는 양적 가치에만 주목한 것은 아니다. 권위지답게 한국의 정치·경제적 상황과 어떻게 조응한 결과인지 분석을 곁들였다.

그러나 이 놀라운 현상을 뒤따라온 것 가운데는 전혀 놀랍지 않은 것도 있다. ‘나꼼수’는 위험하니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주어만 바뀌었을 뿐 무척 낯익은 언설이다. 비하와 경계의 반대편에는 찬양과 열광이 있다. 이것도 아주 낯선 것만은 아니다.

둘은 가치평가가 다를 뿐, 인식 구조는 상동적이다. 서울시장 선거의 1등 역적이거나 정반대로 1등 공신이다. ‘나꼼수’를 힘의 실체로 보는 것에서 둘은 같다. 매스커뮤니케이션 효과 이론의 전형적 시각이다. 이 이론의 고전은 ‘총알 효과’ 이론이다. 총을 쏘면 눈앞의 사람이 고꾸라지듯이, 매스커뮤니케이션의 효과는 매우 강하고 즉각적이라는 얘기다.

이와 관련한 연구를 가장 일찍, 그리고 광적으로 한 자는 다름 아닌 나치 선전장관 괴벨스였다. 물론 대중을 선동하려는 목적이었다. 커뮤니케이션 효과 이론은 그 기원만큼이나 대중에 대한 인식 태도도 불온하다. 대중은 백지 혹은 백치 상태의 타자다. 그들은 언제나 정치적 동원의 대상이다.

지금이 괴벨스 시대라면 어땠을지 몰라도, 나는 ‘나꼼수’를 듣고 정치적 태도를 바꾼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나꼼수’가 실제 투표율에는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나꼼수’는 듣는 이의 정치적 태도를 바꾼 것이 아니라, 같은 태도를 가진 이들의 결속을 매개했을 뿐이다. 반대 태도를 가진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꼼수’는 힘의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징후로 보아야 한다. 정작 이 현상을 추동한 건 ‘나꼼수’ 자신이 아니라 모든 것에서 ‘나꼼수’와 대척점에 있고, 그리하여 쉼없이 ‘나꼼수’의 안줏거리가 된 집단 또는 세력이다. 이를테면 민의의 대의자, ‘사실’(만)의 전달자를 자처하는 정치권력과 주류 언론 따위다. 이들이 만든 신화를 대중은 더는 믿지 않고 있음이 ‘나꼼수’에 투사돼 현상으로 발현한 것이다.

‘나꼼수’가 지배세력에게 위험하다면 편파성과 육두문자 때문이 아니라 형식성 때문이다. ‘나꼼수’의 ‘구라’는 그들의 엄숙한 표정과 언어야말로 진짜 ‘구라’라는 것을 폭로하는 장르로서, 일종의 그림자놀이다. 더 위험한 게 있다면, 그들이 ‘나꼼수’를 통제하고 억압하려 들수록 그들의 대척점에 있는 열혈 지지자들은 ‘나꼼수’가 만드는 그림자를 실체로 믿어버릴지 모른다는 점이다. 상기하자면, 둘은 진부하게 상동적이니까.

※ <한국방송대학보>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