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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가내수공업이 창조한 ‘신개념 하이브리드’ 매체여라

어제(5월 6일) 새벽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5월호 마감을 끝내고 집에 들어가 쓰러져 잤다. 5월 1일 노동절에도 출근해 새벽까지 일했고, 5월 5일 어린이날에도 출근해 새벽까지 일했다. 그 사이에도 주욱 그런 식으로 일했다. 누구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일하는지 회의가 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나는 그동안 노동시간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무엇을 하고 있느냐만 생각했다. 그런 내가 어쩌다 노동시간 때문에 내 일에 회의를 느끼게 된 걸까? 하늘이 내려주신 체력이 쇠진하고, 나도 이제는 늙은 걸까? 아니면 내 노동시간을  정의나 인권의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한 걸까? 

오후에 ‘인권연대’와 ‘연세대 공공거버넌스와 법센터’에서 공동 주최한 집회·시위 토론회에서 발제를 했다. 지난해 여름 국가인권위원회 집회시위특별위원회가 제출했던 보고서는 우여곡절 끝에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서랍 속에 갇히는 처지가 됐다. (난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우리 특별위원회가 심각한 인권침해를 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제 토론회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그 보고서를 놓고, 당시 위원들이 모여 추념하는 자리였는지도 모른다. 많이 떠들었고, 많이 마셨다. 새벽까지 술 마시며 떠들 수 있는 힘은 내 노동시간과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오는 듯했다.

정정훈 변호사가 ‘연재 끝난 뒤에 왜 글을 쓰지 않느냐'고 추궁했다. 글을 쓰지 않으니 행복하다고 답했다. 그래도 글 쓰는 사람이니 글을 쓰시라는 말이 되돌아왔다. 다시, 얼마 전 노보에 글 썼다고 답했다. 빵 터졌고, 우리는 더이상 내 글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해야 할 다른 말들이 너무 많았다.

오늘밤 책상머리에 얌전히 앉아 글이나 한 번 써볼까?

아래 글은 그 노보 글이다.


4월 말 깊은 밤, 내 등 뒤는 고요하다. 컴퓨터 자판 소리만 목어(木魚) 두드리는 소리처럼 짧고 규칙적으로 들려온다. 짧고 규칙적인 소리는 ‘고요한 소음’이다. 목어 소리는 가까운 소리다. 하지만 그 가까운 소리는 마주한 범종의 먼 소리를 예고하는 소리이기도 하다. 삼라만상을 깨우는 소리가 거기에서 처음 눈뜬다. 지금 등 뒤에서 들려오는 저 가까운 소리는 어떤 먼 소리를 마중해 불러올 것인가.

물론, 내가 있는 곳이 절간은 아니다. 4층 미디어사업국 가장 깊숙한 귀퉁이. 여기에 단출하게 모여 앉은 몇 사람이 오늘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만들고 있다. <르 디플로> 자리는 경제 월간지 <이코노미 인사이트> 창간팀 자리와 등지고 있다. 아니, 그런 부정적인 어감은 맞지 않는다. 등 뒤로도 일하는 모습이 훤히 보일 만큼 살갑다. 우리는 등을 마주한 도반이다. 둘이 많이 닮아 있는 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매체 창간을 앞둔 그곳이 고요하기만 하다. 백병전을 방불케 해도 모자랄 판에, 폭력이라고는 한 번 당해본 적도 휘둘러본 적도 없는 <아바타>의 나비족처럼 서늘하게, 평화롭게 일한다. 창간팀의 규모도 <르 디플로>의 그것만큼이나 단출하다. 가내수공업에 맞춤한 규모다. 이래서야 새 매체가 제때 제대로 태어날 수나 있을까. 그러나 나는 남우세스럽지 않다. 나는 이렇게 믿고 있다. ‘창간호는 나온다, 그것도 아주 깊은 울림으로’.

<이코노미 인사이트>의 창간 전 풍경은 이 매체의 성격과 비전을 지시하고, 이 매체는 물론, 나아가 인쇄매체 전체의 미래까지 제시할 것이라고 나는 기대한다. 번쩍이는 기계로 가득찬 대공장의 풍경은 정작 그 기계에 딸린 인간의 노동이 곧 소외임을 일깨웠듯이, 이 낯선 매체를 만드는 낯선 풍경은 우리가 여태 보아왔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매체들로부터 <이코노미 인사이트>가 정확히 결별할 것임을 예고한다. 문제는 생산양식이다.

창간팀의 규모는 생산양식에 조응하는 1차적 조건이다. 휴일도 없이 연일 날밤을 새온 창간팀에게는 무척 미안한 얘기지만, 규모가 더 컸으면 ‘신개념 하이브리드형’이라는 콘셉트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규모가 단출했기에 취재기자와 출입처 중심에서 에디터와 탈매체적 콘텐츠 중심으로 진화론적 더듬수가 발휘될 수 있었다. 석유자원과 배출가스를 감당할 수 있는 지구의 용량이 무한정이라면 하이브리드 자동차는 개발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겨레21>, <씨네21>, <한겨레리빙>, <허스토리>…. 한겨레신문사 매체 창간사만 돌아봐도 규모와 생산양식이 어긋난 경우는 없었다. 어긋나 보이는 건 성공과 실패라는 결과였지만, 매체들의 운명이 갈렸던 분기점은 매체 창간 이후가 아니었다. 결과보다 선행한 것은 창간 이전, 규모와 관련한 조건이었다. 적어도 생산단위의 크기가 성공의 열쇠는 아니었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오히려 크기 자체가 실패를 구조화한 적은 없었던가 되물어야 한다.

지금이 적정 규모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새로운 방식에서도 필요인원은 이보다 훨씬 많다. 다만 돌이켜보건대, 인원이 얼마였든 창간 단계에서는 언제나 인력 과소 상태였고, 그들은 예외없이 만성 과로 상태였다. 인원을 더 늘렸으면 과로하지 않았을까. 이것이 들려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규모는 모자라거나 넘치는 문제이기에 앞서, ‘무엇을’과 ‘그래서 어떻게’ 혹은 ‘어떻게’와 ‘그래서 무엇을’을 상상하고 기획하는 문제에 닿아 있다.

이것은 통계도 아니고, 경향도 아니다. 그렇다고 법칙도 아니다. 조건에 기반한 관계의 구성과 작용의 문제다. 그래서 다시 생산양식의 문제다. <이코노미 인사이트>가 말하는 ‘신개념 하이브리드형’은 그것을 가까스로 표현한 언어적 상징일 뿐이다. 그러나 전두엽만 근질거리게 하던 이 사소한 상징이 창간 과정에서 벌여놓은 ‘차이’는 예상보다 컸다. 나는 그것을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3인의 경제학자 인터뷰 기사에서 발견했다.

미국의 스티글리츠, 프랑스의 자크 사피르 그리고 한국의 구중심처에 앉아 있는 신현송. 이론적 계보에서 좀처럼 한자리에 마주하기 힘든 이들을 <이코노미 인사이트>는 호출했다. 섭외력이 놀라운가? 아니다. 이들 세 사람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대담을 할 필요는 없었다. 스티글리츠는 프랑스 <알테르나티브 에코노미크> 인터뷰 기사에서 가져왔고, 사피르는 전자우편으로 인터뷰했으며, 신현송은 청와대로 찾아가 대면 인터뷰를 했다.

그러나 이들은 현실 금융·재정 위기의 근원을 진단하는 데 있어서 오랜 학문적 교우관계를 쌓아온 것처럼 ‘차이 속 조화’를 절묘하게 드러냈다. 굳이 첨단정보통신기술을 동원한 가상현실 따위는 필요없다. 지면에서도 얼마든지 영역과 층위의 교집합은 형성된다. 오히려 인쇄매체이기에 더 정교한 재구성이 가능한지 모른다. 나는 <이코노미 인사이트> 교열 대장을 보며 ‘인쇄매체는 더는 평평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인쇄매체는 ‘오래된 미래’다.

다시 5월 초 깊은 밤, <르 디플로> 5월호 마감으로 정신이 없는 가운데 이 글을 쓴다. 그 사이 <이코노미 인사이트> 창간호는 인쇄와 제본을 끝내고 시중에 배포되기 시작했다. 몇 달째 하루도 못 쉬고 일했던 한광덕 선배와 조계완씨는 지금도 자판을 또닥이며 온라인 작업에 매달려 있다. 나는 무엇보다 두 사람이 끝까지 쓰러지지 않은 데 경의를 표하지만, 그들 둘만 있었다면 필히 쓰러졌으리라는 말도 빠뜨릴 수 없다.

각별히 이정훈 선배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내 일처럼 창간 작업에 매달렸다. 그러고 보니 <이코노미 인사이트> 생산 단위는 결코 작지 않다. 탈영토는 영토가 없는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가 영토다. <이코노미 인사이트>가 이 무한한 무대 위에서 얼마나 깊게 울리고 멀리 퍼져갈지는 알 수 없지만, 생산양식에서부터 전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들의 고생은 값지다. 그리고 이제부터 이 낯선 매체는 한겨레신문사에게 적용의 문제가 아니라 토대의 문제일 것이다. 안 그런가, 스티글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