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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빵꾸똥꾸야”로 새해 인사를

다의어를 유일적 기의로만 해석하는 방통심의위
참말로 거시기한 국가권력의 변태스런 검열행태
 
비원(悲願)으로 새해를 맞는 이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을 테지만, 난 올 한 해를 그래도 유쾌하게 보내고 싶다. 광야에 부는 비바람에 부끄러움을 비켜갈 도리는 없겠으나, 시분할로 비치는 찰나의 부챗살 햇볕에서나마 아드레날린을 순간 분출하고 싶다. 휴일 텔레비전 앞에 앉아 어린 딸아이와 <지붕 뚫고 하이킥> 재방송을 보며 깔깔거리고 싶다. ‘짱구 폐인’인 철부지 부녀가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를 거듭 보며, 복화술 하듯 익숙한 대사를 주고받는 재미도 쏠쏠할 테지.

그러려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민망함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이들 두 프로그램을 미성년자와 함께 시청하면 미풍양속을 몸소 사수하려는 국가권력의 도덕적 통박을 맞게 될 테니 말이다. 어린 여자 탤런트가 “빵꾸똥꾸야”라고 대사를 칠 때나, 젖내 나는 만화 속 사내 녀석이 아리따운 연상녀에게 느끼한 미소를 날릴 때마다, 우리 모녀는 자지러지지 않을 재간이 없다. 어쩌겠는가,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어린 딸아이에게 불량 시청자라는 낙인을 찍는다 한들.

언론학자 전규찬은 ‘심의’를 빙자한 ‘검열’을 이렇게 통박한다. “심의가 자아와 타자간의 대화라면, 검열은 상대편을 배려하지 않는 자아의 독백이다.” <지붕 뚫고 하이킥>과 <짱구는 못말려>에 대한 방통심의위의 권고 조처는 두 말할 나위 없이 후자다. 지금 그들은 “빵꾸똥꾸야”라는, (그들에게만) 요령부득인 다의어(多意語)를 가슴으로 느끼려고 노력하는 대신, 엄숙주의라는 폭력으로 애써 틀어막으려 하고 있다. “우리에겐 아무 공감 능력이 없다”는 무의식적 독백과 함께.

하나의 기표에서 유일적 기의만 추출하는 것은 권위주의의 본성이다. 그 본성은 예술과 외설, 음란의 질감차를 식별하지 못하며, 무슨 표현이든 이데올로기의 깔때기를 거쳐서만 이해할 수 있다. 화가 신학철의 <모내기>를 보안법상 고무찬양으로밖에 읽어내지 못한다. “빵꾸똥꾸야”의 억눌린 동심도, 짱구의 조숙한 동심도, 음란의 기호일 뿐이다. 음란은 곧 체제도전이다. 음란해서 체제도전이 아니라 모든 도전은 음란한 것이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어디 감히….’
 
그러나 정작 음란한 건 모든 기호를 음란하다고 느끼는 그들 자신이다. 나이 들어서도 알파벳 몇 글자만 조합해 놓으면 반사적으로 여성의 알몸을 연상하는, 갓 몽정을 겪은 소년과 다를 바 없는 어른을, 우리는 변태라 부른다.

이렇게 말해봐야 여전히 “빵꾸똥꾸야”를 음란하게만 느끼는 그들에게 어린 딸아이와 함께 이 지면을 빌려, 영화 <황산벌>의 대사를 인용한 새해 인사말을 전하고자 한다. “참 ‘거시기’허요잉.” (‘거시기’의 뜻을 몰라 허둥대는 신라군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 <한국방송대학보> 제1568호(2010-01-04)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