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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기진맥진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2009년 즈믄해를 보내며 방송판을 되돌아보니…

2009년 1월 1일, 기진맥진해서 눈을 떴다. 전날 국회 안팎에서 밤늦게까지 대치가 계속된 터였다. 여당의 방송법 직권상정은 미뤄졌지만, 방송사 총파업은 새해 첫날에도 계속되고 있었다. 방송판 토정비결은 불길하기만 했다. 다시 연말. 그 사이 불길한 예측과 전망은 하나하나 현실이 되었다. 방송법은 날치기 통과됐고, 헌법재판소는 이를 불법이라 인정하면서도 그 불법을 승인했다. (헌재는 한껏 힘을 과시했지만, 정작 존재의 당위를 잃었다.) “방송 독립”을 외치던 이들은 감옥에도 가고, 해고도 됐으며, 멀리 귀양을 떠나기도 했다.

1년 사이 분위기도 많이 변했다. 방송 총파업은 더는 기대하기 어렵다. 싸움은 국지화되었다. 이를테면 MBC의 임원 선임을 둘러싸고 MBC 최대 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와 노조가 대립하고 있다. KBS에서는 대통령 특보 출신 사장 임명에 맞선 파업 찬반투표가 부결되면서, 노조의 미온적 태도를 비판하는 쪽에서 대안 노조 설립에 나섰다. 다른 한편에서는 종합편성채널이라는 떡고물을 놓고 대형 신문사들끼리 새로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1년 뒤의 달라진 이런 풍경은 입법 이전과 입법 이후의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법이 한 사회의 알파이자 오메가일 수는 없다. 방송 독립을 위한 법제도가 있지만 “법대로”라는 외침이 방송 독립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한 것만 봐도 그렇다. 법의 정의란 대체로 칼 맞은 뒤에 갑옷을 입혀주는 격이다. 정연주 전 KBS 사장 강제 해임이 무효라는 법원 판결이 나왔지만, 대통령 특보 출신 사장은 이미 개별 프로그램까지 장악하고 있다. 올 한 해 방송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시도들은 대부분 법의 형식적 절차를 따른 것이었다. 다만 그 준법이 저열했고, 법의 그물망이 너무 성겼을 뿐이다.

법이 입법 취지를 배반하는 일은 도처에서 벌어지지만, 방송계에서는 그 모순이 유별나게 도드라진다. KBS와 MBC의 경영권은 여야 지분이 반영된 방송통신위원회를 통해 창출된다. 그러나 정치권력으로부터 방송 독립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지난 정권 때 제도화된 이 기구는 오히려 정치권력의 방송 장악을 위한 지렛대가 되고 말았다. 여야가 지분을 나눠가지면 누구도 방송을 ‘독식’할 수 없을 거라는 건 그들만의 생각이었다. 선한 권력이 됐든 악한 권력이 됐든, 방송에게 있어서 권력의 방송 장악은 모두 악이다.

법이 전부가 아니라면, 역설적으로 방송 독립을 위해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방송사들이 그토록 ‘방송의 주인’이라고 주워섬기는 우리 시청자들도 기진맥진해 있을 때만은 아닌 것 같다. 새해에는 토정비결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방송의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도 고민해보자.

※ <방송통신대학보> 제1567호(2009-12-28)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