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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진달래와 배아줄기세포의 관계




  황우석 교수 연구실로 가는 계단과 복도 바닥을 따라 깔린 진달래 꽃길은 디엔에이 분자구조처럼 가지런했다. 가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갈 사람은, 바로 그 연구실의 주인일 터이다. 그 꽃을 늘어놓은 이들은 자신의 심정처럼 시인 김소월의 심정도 그러했으리라 믿었을지 모르겠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김소월 시가 누구에게 바치는 애가인지 알지 못한다. 국어 교과서 싯구 아래 빨간 펜으로 밑줄 긋고 ‘조국’ ‘민족’이라고 썼던 기억이 어렴풋하지만, 그건 학력고사용 해석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시 해석은 적어도 객관식은 아니다. 시를 현실의 무대 위에 퍼포먼스로 재현한 ‘아이 러브 황우석’ 회원들의 해석이 사지선다의 특정 번호에 가지런이 몰려 있지 않기를, 우리 문학교육의 실패가 그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기를 빈다.

  과학적 진실은 과학으로 검증해야 한다는 말이 힘을 얻어가는 모양새다. 황 교수 연구의 진실성 평가는 언론이나 시민단체가 나서서는 안 될 일이며, 과학계가 시간을 두고 차분히 과학적으로 검증해야 한다는 얘기다. 오로지 과학적 가치가, 과학적 방법론으로, 과학자에 의해, 사회적 가치로 꽃피워야 한다는 ‘과학주의’는 과학계 내부에서조차 치열한 논쟁거리이지만, 무엇보다 그런 주장을 펼치는 (일부) 과학계의 태도는 좀처럼 과학스럽게 가지런해 보이지 않는다.

  ‘시간을 두고 차분히’라는 과학자적 태도는 “배아줄기세포의 진실성 논란이 이 연구의 진행을 ‘무려’ 6개월이나 지체하게 했다”는 과학자 자신들의 주장 앞에서 머쓱해진다. ‘6개월’이라는 시간 계산이 어떤 과학적 데이터를 분석해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는 하루를 평생으로 알면서 6개월 동안 182차례나 세대를 물려가는 하루살이의 시간 관념에 가깝다. 그런데 ‘시간을 두고 천천히’라니. 나노초를 계산하든 몇만 광년을 논하든, 과학의 이름으로 측정되는 시간은 가치배제적으로 가지런해야 한다. 과학의 이름으로 과학 자신을 부정하는 이런 역설의 화법은 그 자체로 과학적이지 않다. 시라면 몰라도.

  처음에는 이런 비과학적인 수사가 과학계에서만 나오는 얘기인 줄 알았더니, 뒤이어 언론들도 덩달아 마이크에 대고 ‘과학에 의한, 과학을 위한, 과학의, 과학’을 합창하기 시작했다. 거의 찬양 일변도이기는 했어도, 그동안 ‘세계 최초’와 ‘경제적 가치’ 따위의 열쇳말로 과학을 수없이 ‘검색’해온 과거 행적에 비춰보면 생뚱맞은 노릇이다. 황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연구논문도 언론의 ‘인기 검색어’ 1순위에 올랐기에 오늘의 영과 욕과, 다시 영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과학’은 금칙어라고 한다. 어찌 감히 언론이 과학을 검증하겠느냐며 머리를 조아린다. 자신들만의 전문성을 주장하는 이 나라의 수많은 영역과 분야 가운데 왜 유독 과학만 언론의 검증에서 열외이어야 하는지, 그렇다면 과학에게는 나팔수 노릇만 하겠다는 건지, 그도 아니면 아예 과학과는 담 쌓고 살겠다는 건지, 더는 설명이 없다. 이거야, 과학담당 기자들에게는 생존권이 걸린 문제가 아닌가.

  어쨌든 겸손이 나쁠 거야 없다. 하지만, 언론은 겸손도 폭력적으로, 언론스럽게 겸손하다. “겸손하라. 안 그러면 ‘피디수첩’처럼 죽어!” 언론인의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두려운 무력시위를 맞닥뜨린 느낌이다. 다같이 벌거벗는 목욕탕은 사회적 평등이 구현되는 공간이라기에 들어갔더니 옆에 있는 벌거숭이가 ‘차카게 살자’라는 문신을 내비치며 근육 자랑을 하고 있는 꼴이다. “차카게 살아. 안 그러면 죽어!” 난, 분수 모르고 나대다 ‘문신남’이 사우나 문을 밖에서 걸어잠그는 바람에 질식사한 ‘피디수첩’이 참으로 애석하다. 그 죽임의 손들이 무섭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방식이 가증스럽다.

  사칭하고, 얼르고, 협박하고, 거래하고, 심지어 훔치는 일은, 고백하건대 이 바닥의 무용담거리다. 피디수첩보다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덜 하지 않았을 그들이 회개 한번 하지 않고 취재윤리를 설파하고 있으니, 이건 도무지 시도 과학도 아니다. 물론 저널리즘은 더욱 아니다. 그저 부조리극이다. 부조리극에서도 교훈 한 가지쯤 얻는 게 바른 언론인의 자세라면, 새삼, 그리고 거듭, 취재윤리를 강조하는 언론들 덕분에 나도 성찰의 시간을 보내야겠다. 그러나 저러나 이제 ‘잠입 취재’는 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게 생겼다.

  지난 8일치 조간신문들의 1면에는 텁수룩하게 수염이 자란 황 교수가 초췌한 모습으로 침상에 누운 사진이 일제히 실렸다. 보름쯤 전 돌연 세상과 연락을 끊고 한동안 ‘소문’과 ‘전언’으로만 떠돌던 그가, 수많은 난치병 환자들의 유일한 희망이던 그가, 오히려 병자가 되어 병원으로 ‘잠입’했다. 의학적 소견상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는, 그래서 입원 사실도 확인해줄 수 없다는, 그렇더라도 병실은 절대 알려줄 수 없다는, 정 그렇게 국민이 원한다면 사진 기자 한 명만 들어가 촬영할 수 있다는 병원 쪽의 철저한 보안 속에, 지면으로나마, 그러나 대대적으로, 사생활 보호 윤리에 아랑곳 않는 그 언론들에 의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황 교수는 아직 말이 없다. 세상으로 다시 돌아오기 전 지인을 통해 “과학계를 매도하는 사회 분위기가 개탄스럽다”고 말했다는 게 최근 알려진 그의 발언의 전부다. 그러나 그가 세상과 연락을 끊고 있던 사이 사회는 과학계를 매도하는 분위기가 결코 아니었다는 걸, 과학계를 매도하려고 했다는 의심만 사도 15년 전통의 피디 저널리즘쯤은 그만 막을 내려야 하는 분위기였다는 걸, 세상과 연락을 끊고 지내서인지 그는 알지 못한 것 같다. 정작 그가 그토록 아끼고 애틋해하는 과학계에서 황 교수 논문을 자체 검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건강한 배아줄기세포처럼 쑥쑥 자라나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과학에 문외한인 나도 이 정도는 안다. 침대가 과학일지언정, 묵언수행은 과학이 아니라는 것을. 묵묵히 연구만 하고 세상에 검증해 보여주지 않는 것은 과학적 태도가 아니라는 것도. 이제 황 교수가 병상에서 떨쳐 일어나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자체로 여성의 몸인 난자를 대하듯 애틋하게, 진달래꽃을 사뿐히 사뿐히 즈려 밟고 연구실로 돌아가, 자신의 연구는 진실했고 과학은 위대하다는 것을 보란 듯이 세상에 검증해 보여주기를, 하루를 일생처럼 느끼며 초조하게 기다리는 나 같은 비과학적 언론인도 사지선다의 한 번호로 가지런히 매겨져 있다는 것을, 황 교수는 알아주기를 빈다.

                                                                                                     (2005년 12월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