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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제척과 친피가 없는 18세기적 한국 언론


 
법을 만드는 국회가 불법 사태로 몸살을 앓고 있다. 대리투표와 재투표는 입법부의 자기존재부정이다. 제1야당은 100일 장외투쟁을 선포하고, 국회 밖에서 ‘법치 구현’을 도모하고 있다. 언론이라면 이론적으로는 대서특필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경험칙은 전혀 다른 얘기를 들려준다. 일부 언론의 경우 이 사태를 크게 보도하는 게 오히려 기이하게 비쳤을 것이다. 경험이 일러준 대로, 그들은 거의 침묵하고 있다.

일전에 이 지면을 통해 언론이 액면 그대로 ‘사회의 목탁’이 될 수 없는 존재론적 한계를 말한 적이 있다. 엄격한 객관성이 직업윤리의 핵심을 이룰수록 원칙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법관에게는 ‘제척(除斥)’이라는 규범이 있다. 특정 사건의 당사자나 사건 내용과 특수관계에 있는 법관을 해당 재판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과거 시험에서는 근친 간에 시관(試官)과 과생(科生)이 되는 것을 피하는 ‘친피(親避)’가 있었다.

    

언론(인)이라고 존재의 주관성을 초월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언론에는 제척이나 친피 같은 강제 규범이 없다. 언론(인)의 양식에 맡기거나, 수용자들이 매체나 기사를 스스로 선별하고 배척하는 도리밖에 없다. 언론관계법은 언론 자신이 핵심 이해 당사자다. 특히 몇몇 대형 신문사는 방송 진출 허용이라는 가장 큰 ‘혜택’을 입게 돼있었다. 이들은 지면을 통해 언론관계법에 지원사격을 했고, 입법 과정에서의 불법 논란에는 입을 닫아걸었다.

제척·친피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나’를 드러냈어야 하지는 않을까. 그러나 이들의 언론관계법 보도에는 1인칭 주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가장 애용해온 ‘국가경제/성장’ 프레임을 동원해 일자리 창출과 미디어산업 발전이라는, 그 타당성조차 심각하게 의심받는 ‘공리적’ 담론을 3인칭으로 늘어놓았을 뿐이다. 법이 통과된 뒤에는 불법 논란을 의제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프레임과 선택/배제라는 ‘저널리즘적 연출’이 펼쳐지는 세트장의 모습이다.

이들이 보여준 행태는 왜 언론관계법이 저널리즘의 가치를 배반하는지를 역설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언론시장이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극소수에 의해 장악된다면 사익을 공익으로 둔갑시키고, 사회적 관심을 환기해야 할 의제들을 공론의 장에서 배제하거나 왜곡하는 일이 훨씬 쉬워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국의 언론 자유는 헌법이 모든 국민에게 부여한 보편적 권리에서 멀어져 소수만의 특권적 자유로 국한될 것이다.

이 법이 절차상 결함 때문에 원천무효가 되지 않는 한, 수용자의 현명한 판단과 의식적인 실천 말고는 그런 18세기적 풍경이 도래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어 보인다.

※  이 글은 <한국방송대학보> 제1550호(2009-08-03)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