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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언론이 법원 판결을 ‘활용’하는 풍경들

매개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왜곡한 뒤 두고두고 확대재생산 
 
법원의 판결 결과는 대개 개인에게 귀속되지만, 결국 사회적 규범을 규정하는 구실까지 하게 된다. 이때 법원과 사회를 매개해주는 것은 역시 언론이다. 그만큼 언론의 판결 보도와 해석은 정확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고, 오히려 언론이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1997년과 2002년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 두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이 큰 논란이 됐었다. 이와 관련해 대법원은 2004년 병무 비리 전문가 김대업씨에게 무고와 명예훼손 등으로 징역 1년10월을 선고했다. 대다수 언론은 김씨를 ‘공작정치의 대가’라고 낙인찍었다. 그 낙인은 2007년 대선에서 “BBK 의혹 역시 공작정치”라는 정치선전에 동원됐다.

그러나 김씨가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1997년 이 후보 쪽 인사들과 병무청장이 만나 ‘대책회의’를 했다고 주장한 부분이었다. 만난 건 사실인데, 만나서 대책회의를 했다는 증거는 없다는 것이 판결의 요지였다. 그럼 그 민감한 시기에 왜 만났을까? 지금도 대다수 언론은 그를 ‘공작정치의 대가’로 부른다.

지난해 7월 서울남부지법은 MBC <PD수첩>의 광우병 보도에 대한 농식품부의 정정보도 청구 가운데 일부를 받아들였다. 주저앉은 소를 광우병에 걸렸거나 걸렸을 가능성이 큰 소로 보도한 부분’과 ‘유전자형 때문에 한국인의 광우병 발병 위험성이 높다고 보도한 부분’ 등 2가지를 정정보도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주저앉은 소가 광우병에 걸렸을 개연성이 멀쩡한 소보다 높은 건 사실이다. 한국인 유전자형 관련 보도는 이미 PD수첩이 정정보도한 것이었다. MBC는 곧바로 항소했다. 그러나 대다수 언론들은 <PD수첩> 보도 전체가 허위라고 판결난 것처럼 보도하며 ‘괴담’이라는 딱지를 붙였고, 지금도 끝없이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얼마 전 대법원은 2004년 24회에 걸쳐 천성산 터널공사 현장에서 굴삭기 앞을 가로막고 앉아 농성을 벌인 지율 스님에 대해 업무방해죄를 확정했다. 스님 때문에 공사가 지연된 건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날수로 350일이 넘는 다섯 번의 단식을 이어가면서 주장했던 환경 파괴 우려는 최근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물론 대다수 언론들은 이 사실을 보도하지 않는다. 대신 대법원 판결을 두고 스님의 고행뿐 아니라 ‘환경운동 전체의 허구성’이 입증됐다는 듯이 떠들고 있다. 심지어 공사중단 기간은 6개월이고 손실액은 145억이라고 지난해 정정보도를 냈던 신문들조차 다시 최소 15개월 공사 중단에 2조원의 손실을 입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쯤 되면 기억 상실증이다.

법원은 왜 이런 보도들을 보고만 있는지 모르겠다. 법원에 대한 명예훼손이자 업무방해 아닌가.

※ 이 글은 <한국방송대학보> 제 1538호(2009. 5. 4)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