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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와 홀로도모르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헤르타 뮐러의 영롱한 장편소설 는 1945년 1월 루마니아의 한 소도시에서 시작된다. 독일계 17살 소년 레오폴트 아우베르크는 소련 강제수용소 이송자 명단에 오른다. 소년은 축음기 상자를 트렁크 삼아 아버지의 먼지막이 외투, 할아버지의 우단 깃이 달린 도회풍 외투, 삼촌의 니커보커 바지(무릎 아래 부분을 졸라맨 짧은 바지), 이웃 아저씨의 가죽 각반, 고모의 초록색 양모 장갑, 자신의 포도주색 실크 스카프를 꾸려 넣는다. 이 무계통의 물건들이 보여주는 건, 소년은 물론 그에게 뭐라도 쥐여 보내려는 누구도 강제수용소가 어떤 곳이고 거기서 무슨 일을 겪을지 전혀 가늠하지 못하는 짙은 막막함이다. 결국 물건들의 쓸모는 굶어 죽거나 얼어 죽지 않으려고 수용소의 러시아인 감독자에게..
‘이대남’의 약발도 소멸한다 20대 대통령 선거는 이미 만신창이다. 15일 개시된 공식 선거운동은 오랜 정치적 내전 상태에서 뒤늦게 나온 선전포고처럼 뜬금없어 보이고, ‘공약으로 승부하라’는 지당한 주문은 작렬하는 포탄 앞에서 평화선언을 주창하는 것만큼이나 초현실적으로 들린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20대 대선이 역대 최악의 적대적 선거로 흐르고 있다는 데 이론을 찾기 어렵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귀엣말의 외설로 기억되던 1992년 대선마저 어느덧 ‘인지상정’의 미담 설화로 느껴질 지경이 되었다. 알다시피 이번 대선의 적대성을 상징하는 대표 집단은 ‘이대남’(20대 남성)이다.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의 단문 메시지에 열광적으로 반응하면서 대선 판세를 일거에 흔들어놓은 장본인들로 지목된다. 전체 유권자의 6.7%에..
조선족, 한복 입은 디아스포라 베이징겨울올림픽 개막식에서 한복 입은 출연자가 등장하자 한국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누리꾼들이 ‘동북공정’을 비꼬아 표현한 ‘한복공정’은 한복이 한국 전통의상이라는 사실만 놓고 보면 단순명쾌한 풍자 같지만, 그 출연자가 ‘조선족’이라는 변수를 추가하는 순간 고차방정식이 되고 만다.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을 대표해서 나온 이들은 제가끔 자신의 전통의상을 입었다. 조선족 대표는 무슨 옷을 입었어야 했을까. 이 물음은 ‘조선족은 누구인가’라는 물음과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조선족’은 공식 용어가 아니다. 영화에서 주로 치안과 민생을 위협하는 범죄자로 재현되듯이, 비칭이나 멸칭에 가깝다. 법률상 용어는 ‘한국계 중국인’이다. 중국에서 ‘조선족’은 공식 용어다. 한민족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이..
전화 도수제와 ‘용건만 간단히’ ‘전화 도수제’는 발신 통화 횟수에 따라 요금을 매기는 제도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시외전화를 하려고 우체국에 찾아가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통화가 끝나면 창구 직원이 몇 도수가 나왔다고 일러주고 요금을 받았다. 지금도 도수제는 공중전화에 골격이 남아 있다. 한번 전화를 걸 때마다 먼저 기본요금을 투입하고, 정해진 시간이 되기 전에 끊어도 남은 시간 차액이 환불되지 않는다. 1896년 경복궁 내부에서 시작된 우리나라의 전화 역사를 보면, 공중전화 말고도 몇차례 도수제가 도입돼 운영되고는 했다. 1937년 7월1일 경성국에서 가입자 5000명 이상인 지역에 한해 전화 사용료를 기본료와 도수료로 구분해 징수한 것이 첫 기록이다. 미군정 때인 1948년 6월1일 시행된 군정법령 제2036호는 1급지에 대해 ..
‘여가부 해체’와 ‘멸공’이 말하지 않은 것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말은 극단적으로 짧았다. ‘설화’를 줄이기 위한 전술의 일환이 아닐까 짐작도 해봤다. 그러나 훨씬 강력한 쓸모는 상대의 말문을 막는 것이었다. 윤 후보는 ‘여성가족부 폐지’ 일곱 글자의 뜻을 묻는 기자들에게 “뭐든지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주시길 바란다”고 했다. 엉터리없는 동문서답이 아니다. 더는 묻지도, 답변을 기대하지도 말라는 거다. 그리하여 ‘여성가족부 폐지’는 설명 따위 필요 없는 암기과목의 단답형 정답이 됐다. 문제는 그 정답이 누구에게 제출됐는가다. 빨간펜은 ‘이대남’이 쥔 모양새다. 말이 잘려나간 자리는 ‘밈’(meme·인터넷에 퍼뜨리기 위해 연출한 이미지물)으로 채워졌다. 윤 후보가 멸치와 콩으로 몸소 시전했다. 밈의 순기능은 ‘풍자’다. 쓰..
신지예의 ‘정체성 정치’ “특정 종교, 민족, 사회적 배경 등을 가진 사람들이 전통적이고 광범위한 기반의 정당정치에서 탈피해 배타적인 정치적 연합을 형성하는 경향이다.” ‘정체성 정치’에 대해 영국 옥스퍼드대 출판사의 웹 사전 ‘렉시코’(Lexico)가 내린 정의다. 오늘날 정체성 정치의 대표적 하위 범주인 ‘젠더’가 예시에서 빠져 있어 아쉽다. 대신 ‘배타적’이라는 표현을 써서, 정체성 정치가 빠질 우려가 있는 함정이 뭔지 암시한 대목은 인상적이다. 정체성 정치는 소수자들에게 유력한 정치투쟁 수단이다. 이들은 기성 정치체제로는 대의되지 못하는 정체성을 억압의 경험을 통해 공유하고, 억압에 맞서 연대한다. 다만 두 개의 다른 정체성 사이에 오직 소수자라는 이유로 보편적 지평이 열리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나(우리)의 고통은 오직 ..
조동연은 ‘피해자’에 미달하는가 “민주당 이재명 캠프의 공동상임선대위원장으로 영입된 조동연 교수가 ‘사생활 논란’(홑따옴표 필자 첨가)으로 문제가 불거지자 어제 사퇴 의사를 밝혔다. 사생활 논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거짓에 기초한 가정 구성이나 삶의 태도’(〃)는 성별을 떠나 문제가 있다.” 현실 정치권 안에서 젠더 평등을 실현하고자 하는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가 지난 3일 발표한 입장문의 첫 단락이다. 나는 저 문장 앞에서 몇날 며칠 배회했다. 몇번을 읽고 또 읽었다. 물론 입장문의 취지는 조동연을 비판하는 데 있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을 비판하는 데 있었다. 셋째 단락부터 입장문의 문제의식은 확연해진다.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는 ‘조동연 사태’(〃)의 원인을 조동연 개인이 아닌 민주당에서 찾는다. 흔히 정당은 문지기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세금, ‘폭탄’과 ‘구제’의 메타포 ‘종부세 폭탄’이라는 은유의 폭탄이 연쇄폭발하고 있다. 상위 2%만 고지서를 구경할 수 있다는 노블레스(고귀)한 세금이 전쟁이나 테러를 연상시키는 표현과 결합해 일으키는 위력은 대단하다. 최근 (YTN)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종부세에 대한 부정적 의견이 긍정적 의견보다 13.9%포인트 높았다. 이런 여론 지형은 장기간 유지돼왔다. ‘유지+강화’ 의견이 52.3%로 높게 나타난 의 조사 결과(11월25~26일)가 여론 변화의 신호인지는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세금 폭탄’은 우리 귀에 딱지가 앉은 표현이지만, 영어(‘tax bomb’)로 구글링해보면 의외로 희소하다. 다큐멘터리 영화 (Falciani's Tax Bomb, 한국어 제목 ‘스위스 비밀계좌를 팝니다’) 정도다. 여기서 ‘세금 폭탄’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