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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글로브, 그 유서 깊은 타락사 “자위 행위를 벌이는 90명의 볼품없는 인간들.” 배우 게리 올드먼이 2014년 어느 인터뷰에서 ‘골든글로브’를 주관하는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에 퍼부은 독설이다. “당신들과 셀카를 찍을 요량으로 주는 금속 조각(트로피).” 2016년 이 상 시상식에서 배우 리키 저베이스가 다른 배우들을 웃기려고 던진 조롱 조의 농담이다. 그는 무려 이 행사의 사회자였다.(, 2021년 2월25일) 아카데미상에 버금간다던 골든글로브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는 사실은 최근 미국 (NBC) 방송이 내년 시상식을 중계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졌다. 는 이 협회의 추문이 쉼 없이 터지자 결국 중계 수익을 포기했다. 협회가 지난 2년 동안 회원들에게 규정에 없는 200만달러(약 22억2천만원)를 나눠 주고, 2..
만국의 벼락거지여, 단결하라 ‘벼락거지’라는 신조어를 처음 접했을 때의 기분을 한 단어로 축약하는 일은 지금도 난감하다. 유쾌함과는 확실히 거리가 멀었고, 부풀려 말하면 양잿물 같은 액체가 얼굴에 훅 끼얹힌 느낌에 가까웠다. 부동산도, 주식도, 암호화폐도 없는 나를 멸칭하는 거라 여겨져서만은 아니었다. 자기비하의 포즈를 취하려고 하필 길에서 힘겹게 연명하는 약자를 비유의 도구로 삼은 것부터 걸렸다. 적어도 같은 계열 신조어의 선배격인 ‘흙수저’는 자신의 처지를 사물에 빗댈 뿐, 더 열악한 동료 시민의 비참을 끌어와 전시하지는 않았다. 무의식적이어서 되레 공공연하게 배제와 차별을 표상했는지 모른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을뿐더러, 더 심대한 징후적 문제를 품고 있기도 하다. 벼락거지는 범주를 지우는 진공청소기다. 벼락부자 아니면 모두..
백신이 남아돌아도 품절되는 이유 얼마 전 전직 국가 정상과 노벨상 수상자 175명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앞으로 공개편지를 보냈다. 모든 대륙을 망라하는 이 인사들은 코로나19 백신 특허권을 한시적으로 중단하라고 바이든 대통령에게 요구했다. ‘백신 양극화’가 코로나19 못지않은 대재앙이 될 거라는 경고는 보편적인 인류애 위에 서 있다. 다시 그 위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의 날카로운 경제학 이론이 얹혔다. 스티글리츠는 특허권을 비롯한 지적재산권의 경제적 효과를 비판적으로 고찰해왔다. 지적재산권은 정부가 혁신자에게 독점적 이득을 취할 권리를 일정 기간 보장하는 제도다. ‘반독점’의 일반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누구든 적절한 동기가 있어야 혁신에 뛰어들고, 이에 따른 혜택을 다 함께 누릴 수 ..
세월호, 절대적 슬픔과 과학적 진실 눈송이는 굵고 다습해 보였다. 어느덧 서울 벚꽃도 얼추 졌는데, 불과 열흘 전 여론면엔 폭설 사진이 실렸다. 기상청도 놓친 ‘꽃샘 눈’ 풍경 사진인가 했더니, 청와대 분수대 앞 피케팅 사진이었다. 우산을 쓴 채 피켓에 쌓인 눈을 쓸어내는 이의 손 아래로 ‘세월호’ 세 글자가 또렷했고, 나머지 글귀는 눈에 덮여 희부옇다. “급선회 원인과 승객 구조 방기의 이유를 규명하라!” 급작스러운 강설에 방금 샀는지, 우산 끝엔 보증서 꼬리표가 매달려 있었다. 사진 제목은 ‘세월호 7주기에 부쳐’. 1월28일에 촬영했다는 설명이 붙었다. 더는 세월호를 떠올리지 않고 맞을 수 없게 된 4월의 문턱에서, 지난겨울 사진이 지면에 소환된 거였다. ‘철 지난’ 사진이긴 하지만, 세월호의 ‘오늘’을 포착한 이만한 시각적 메타포도..
기억 앞에서 겸손하다는 것 ‘기억 앞에서의 겸손함’이 탁월한 문학적 수사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기억의 불확실성과 자의성에 대한 진지한 자기성찰 없이 저런 표현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그런 능력은 영리함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영리함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뇌과학자들이 기억의 기제를 설명한 것들을 보더라도 저토록 사려 깊은 표현을 만날 수는 없다. 가령, 2000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에릭 캔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기억은 그 핵심에서 보면 심장 박동과 다르지 않은 생물학적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더없이 명쾌하지만, 겸손이나 성찰 대신 상실감을 안긴다. 로맨틱한 기억도 쓰라린 기억도 저 설명 앞에서는 질적 차이를 상실한다. 그러나 오늘날 뇌과학자들의 이론을 참조하지 않고 기억의 원리를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
‘꼬우면 이직하든가’의 공정성 나는 요즘 치밀하게 연출된 몰래카메라에, 그러니까 성착취 동영상이 아니라 30년 전 어름에 개그맨 이경규가 인기몰이했던 그 몰카에 혼자 속고 있는 게 아닌가 착각이 든다. 한국토지주택공사(엘에이치) 내부자들의 땅 투기 의혹에 대한 한국 사회의 집단 분노와 관련돼 있다. 발본색원, 일벌백계, 투기수익 몰수, 물샐틈없는 방지 대책의 필요성에 이백 퍼센트 동의한다. 그러나 집단 분노의 수위나 밀도와는 마음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혹 이상한 사람으로 비치지 않을까 부러 분노를 표출하는 순간, 나를 향해 일제히 “속았지” 하며 박장대소할 것만 같다. 참여연대와 민변이 엘에이치 내부자 10여명의 광명·시흥 신도시 예정지 투기 정황을 처음 폭로했을 때, 한국 사회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는 듯 경악했다. 육하원..
하청노동에 비친 후쿠시마 10년 2013년 도쿄에서 우편집배원으로 정년퇴직한 이케다 미노루는 이듬해 후쿠시마로 갔다. 그곳에서 1년 남짓 도쿄전력의 3차 하청노동자로 후쿠시마 원전 1호기와 주변 지역의 오염 제거 작업에 투입됐다. 43년 집배원 경험으로는 절대 알 수 없던 세계가 그곳에 있었다. 후쿠시마를 떠날 때, 그는 1년 전의 그가 더는 아니었다. 이후 자신이 겪은 일들을 라는 책으로 펴내고, 탈핵 활동가의 길로 들어섰다. 후쿠시마로 떠나기 전 그의 머릿속은 원전 사고 복구에 힘을 보태겠다는 생각과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반반이었다. 그 생각은 현지에서도 절반씩 실현됐다. 후쿠시마를 사람 살 수 있는 곳으로 되돌리는 데 필요하다는 작업을 하긴 했다. 파견회사도 그 일을 시급으로 쳐서 다달이 돈으로 주긴 줬다. 그러나 현장은 과학 대..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기’의 변주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 경구는 쓰임새를 짚어볼 대목이 적지 않다. 우선 개의 비유가 걸린다. 그래도 ‘동물권’에 대한 인식이 낙후했다고 하는 건 지나친 면이 없지 않다. 경구가 만들어질 무렵에는 동물권은커녕 인권의 개념도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속담 속의 개는 ‘직업에 귀천 없다’는 평등주의와 한 자락 닿아 있다. 다만 평등은 버는 단계가 아니라 쓰는 단계에 달성된다. 프랑스 종교개혁가 장 칼뱅(1509~1564)의 ‘소명으로서의 직업’ 교리와도 연결해 볼 만하다. 직업은 신에 의해 주어진 거여서, 그게 뭐든 죽어라 하고 돈을 버는 게 옳다. 그럼에도 쓰는 단계에서는 철저히 금욕적이어야 한다. 정승은 곧 금욕주의자여야 한다. 우리 속담과 견줄 만한 서구 규범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일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