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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드라마 문법으로 본 카이스트 사태

어느 날 어린 딸아이가 TV를 보다 말고 툭 내뱉는 말이 걸작이었다. “드라마에서 가장 형편없는 죽음은 교통사고로 죽는 것이다. 아무 이유도 없이 죽이고 끝낸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 이유 없는 죽음은 아니다. 드라마를 끝맺어야 하는 제작자가 개연성에 기대어 고민을 간단히 해결하려는, 이유 있는 죽음이다. 드라마뿐이겠는가. 현실 세계에서도 다른 누군가에 의한, 누군가를 위한 개연적 죽음은 숱하다.

최근 카이스트 학생들이 잇달아 자살을 하고, 교수 한 사람도 스스로 목숨을 끊자 언론들이 대서특필하고 나섰다. 언론은 흔히 정치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죽음에 등급을 매긴다. 보도할 것인가 말 것인가, 어느 정도 크기로 보도할 것인가…. 입시 스트레스나 좌절로 목숨을 끊는 고등학생이 한 해 줄잡아 100명이 넘지만, 보도되는 경우는 드물다. 카이스트 사태는 일단 ‘등급외 판정’은 면했다.

선택된 죽음은 이제 해석될 차례다. <조선일보>는 뜬금없이 ‘베르테르 효과’를 들고 나왔다. 그러나 ‘낭만주의 저널리즘’이라 불릴 만한 이 보도에도 한 가지 미덕은 분명히 있다. 다수 언론이 징벌적 등록금제에 의한 경제적 부담을 자살 원인의 하나로 꼽지만, 나랏돈 한 푼 못 받고 살인적 등록금에 신음하는 다른 대학 학생들이 자살하지 않는 현실과 충돌한다. <조선일보>는 적어도 이런 오류를 비켜간다.

징벌적 등록금제는 경제형이라기보다는 명예형이다. 일종의 낙인찍기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전형적 통치전략이다. 신자유주의의 도덕률은 ‘경쟁’이다. 신성화된 경쟁에 ‘과잉’, 다시 말해 ‘지나친 경쟁’이란 애초 존재하지 않는다. 경쟁은 효율 이전에 배제와 이를 통한 훈육이 목적이다. 누군가는 반드시 탈락시켜 본때를 보여야, 신자유주의의 지배질서는 군말 없이 내면화되는 것이다.

서남표 총장은 이 참극 앞에서도 “미국 명문대의 자살률은 더 높다”고 말해 설화를 자청했지만, 자살과 경쟁력의 함수관계에 관한 나름의 소신발언이었을 것이다. 고교등급제처럼 경쟁 없는 봉건적 신분질서가 만연한 이른바 명문 사립대들의 현실만 놓고 보면, 그의 가학성에도 명분이 아주 없지는 않다. 그래봐야 기존 지배질서에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공모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지만 말이다.

<조선일보>는 고교등급제의 음성적 시행에는 한사코 침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유령 제도가 대학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고 떠든다. 카이스트의 ‘경쟁을 위한 경쟁’을 극구 찬양할 때, 고교등급제도 경쟁지상주의의 일원으로 슬며시 편입된다. 미국의 메이도프 사건이나 티파티 발흥에서 보듯, 신자유주의와 봉건주의의 만남은 모순이 아니라 오히려 필연이다. 그리고 이 카르텔에서는 카이스트 학생 같은 엘리트도 외부자일 뿐이다. 미필적 고의에 의해 얼마든지 사고를 당할 수 있다는 얘기다.

※ <한국방송대학보> 1625호(2011년 4월18일)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