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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재스민 혁명 보도가 가리는 것들

1년 만에 <한국방송대학보>에 글을 다시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미디어 현상에 대한 관심의 집중도가 많이 떨어지고, 신문·방송 보지 않는 낙마저 알아버려, 차질없이 연재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일단, 처방을 하나 내렸습니다. 매주 쓰지 않고 격주로 쓰는 것으로. 아무튼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이 글은 다시 시작한 연재 첫 번째 글입니다.


한 시사주간지 최신호 표지 제목은 ‘광기의 종말’이었다. 카다피 리비아 대통령의 사진이 그 옆에 실렸다. 내가 카다피라면 꽤나 서운할 일이다. 한국 언론은 이전에 그를 미친 사람은커녕 독재자라고 규정한 적도 없다. 그가 팬암기 폭탄 테러 의혹을 살 때도 반응은 미지근했다. 그는 한국 기업의 든든한 후원자였고, 따라서 한국 국민의 벗이었다.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이나 벤 알리 전 튀니지 대통령의 경우는 다르다. 한국 언론에는 존재감이 희미하거나 아예 없다가 이제야 카다피와 더불어 악마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셋 다 실은 처음부터 동격이었다. ‘타자’라는 점에서 그렇다. 자의적으로 인지되는 것이나, 인지에서 아예 배제되는 것이나, 타자이기는 매한가지다.

마그레브(아프리카 북서부)의 혁명 도미노 이후에도 언론은 정합적인 분석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혁명의 첫 번째 배경으로 초장기 독재를 꼽는데, 정작 가장 먼저 혁명이 일어난 나라는 그 기간이 22년에 ‘불과’한 튀니지였다. 빈곤 문제도 마찬가지다. 리비아의 1인당 국민소득은 한국과 맞먹는 수준이다. 그러니 남는 건 절대악의 화신들밖에 없다.

한국 언론이 국제 문제에 관심도 없고 전문성도 취약한 건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이른바 ‘재스민 혁명’ 보도의 문제점은 그것만으로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한국 언론이 베끼기에 급급한 서구 언론에서부터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서구의 정치·경제적 패권이 이들 나라의 독재체제와 밀접하게 닿아 있고, 대다수 서구 언론은 그 이해를 대변해왔다.

이집트와 튀니지의 정권은 친서방 정권이었다. 특히 무바라크는 미국 중동지역 패권의 지렛대였다. 이들 나라의 독재는 서구의 승인을 기반으로 했고, 그 대가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수용해 국제투기자본의 배를 불려줬다. 반미주의자로 알려진 카다피조차 대테러 분야에서 미국과 공조한 뒤로 여러모로 서구의 음덕을 입어왔다.

서구 언론의 보도는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혁명이 극심해진 억압과 그로 인한 수탈 및 빈부격차 심화에서 비롯됐다는 동학적 차원에서의 접근 대신, 세 명의 악마를 나란히 전시하는 것으로 갈음했다. 문제를 ‘체제’가 아니라 ‘사람’으로 설정함으로써, 인물 교체 이후 지속적인 통제를 노리는 서구의 의도를 투영한 것이다.

그럼 한국 언론은 순전히 무지의 피해자일까. 유엔으로부터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경고를 받고, 외국자본에 팔아넘긴 자동차 회사의 노동자와 가족 10여명이 목숨을 끊거나 돌연사하고, 고용 없는 성장으로 고학력 청년실업이 넘쳐나는 현실이 들려주는 얘기는 다르다. 마그레브의 타자는 우리 안의 타자를 비추는 거울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