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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가 된 글

지율, 그 잊혀진 이름을 다시 만났다

[기획] 발견 2008 “내가 만난 2008년의 무엇” ⑨ 
미디어스  안영춘 기자  jona01@mediaus.co.kr 
 
 
‘지율’은 잊혀진 이름이다. 아니, 어느 쪽에서는 애써 잊으려 하고, 그 반대쪽에서는 고약한 관형어를 끌어 붙여 끝없이 상기시키려 하는 이름이다. 날수로 350일이 넘는 다섯 번의 단식을 이어가면서, 그보다 우뚝했던 목소리들은 부채감을 뒤로하고 모두 스러졌고, 그보다 날선 목소리들은 정형화된 기계음을 기세 높게 되풀이하고 있다. 천성산은 집단적 기억에서 멀어졌고, 굴착기 소리는 산자락에서만 더욱 요란할 뿐 세상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는다. 숫자와 화폐 단위로 표기된 공사 지연 손실액만이 유일한 기호로, 때만 되면 포장을 바꿔 다시 전시되는 계절상품처럼, 언론과 정치권 등에서 유통기한 없이 유통되고 있을 뿐이다. 

지율과의 옅은 인연 한자락…2008년 종로에서 조우
 
시디. '>나는 그 비구니가 4차 100일 단식을 했던 2005년 새해 머리에 세 시간 가까이 인터뷰를 했다. 청와대 부근 허름한 단칸방에 은거하며 77일째 단식을 이어가던 날이었다. 날씨는 몹시 맵찼다. 나는 돌아와서 눈물을 쏟아가며 이틀이나 걸려 겨우 글을 탈고했으나, 훗날 그가 4차 단식 때보다 더 긴 마지막 단식을 마치고 치명상 입은 양서류마냥 아스라한 풍문 너머로 사라질 때는 그저 콧날이 시큰했고, 홀가분한 기분마저 들었다. 현실은 요지부동이었고, 그의 고행은 끝이 없을 것 같았으나, 그가 극한에서 자취를 감춤으로써, 극한도 끝은 끝이겠다 싶었고, 내내 불편했던 내 안의 체기도 어느 정도 내려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그를 아주 잊고 지낼 수는 없었다. 내 젊음도 사랑도 시들해지고 세상에 가닿는 시선도 데면데면 해졌다 싶을 때나, 요지부동의 사회 현실이 중력에 미끄러지는 낙석지대 바위처럼 쿵쿵 발치에 떨어지는 것을 느낄 때, 지율이라는 이름은 아련하게 또는 느닷없이 떠오르곤 했고, 그럴 때마다 명치끝이 다시 저렸다. 펄스 부호처럼 그렇게 3년 하고도 아홉달이 똑…똑…똑… 지나고……, 지난 9월 서울 종로통 차 안에서 신호대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차창 너머로 종잇장처럼 팔랑팔랑 걸어가는 비구니가 보였다. 처음엔 내 눈을 의심했지만, 밀짚모자를 눌러쓴 그이는 분명 지율 스님이었다. 나도 모르게 조수석 문을 열고 그에게 달려가 합장했다.

그는 잠시 기억을 더듬는 표정을 짓더니 엷게 웃으며 합장을 받았다. 몸피는 77일을 굶었을 때나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겨우 물은 것이 “여기에 어쩐 일이시냐?”였고, “언론 소송 일 때문에 왔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의 ‘일’을 더 물어야 했으나, 묻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에 대한 ‘정보 없음’과, 그 원인인 ‘무관심’을 들키기 싫었다. 다시 “어디에서 지내시느냐?”고 물었다. (적조한 사이끼리 오가는 대화는 이처럼 순서와 내용이 정해져 있기 마련이다.) “경상도 어느 산골짜기에 산다”고 했다. 산문 밖에 머무는 것으로 짐작은 갔지만, 이번에도 더는 묻지 못했다. 그는 합장을 하고는 동행의 발길을 재촉했다. 한동안 혼자 우두커니 그 자리에 박혀 서있었다.

늦더위가 아직 기승을 부리던 10월 하순, <경향신문>에 그의 인터뷰 기사가 두 면에 걸쳐 실렸다. 그가 극한의 단식을 이어가던 시절, 읽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글을 발표하곤 했던 김택근 논설위원이 그의 거처를 다녀온 듯했다. 경북 영덕 칠보산 기슭이라고 했다. 짐작대로 산문 밖이었다. 나는 촉수를 더듬었다. ‘다시 세상으로 나오려나… 그래서 언론소송이라는 것도 하는 건가….’ 그런데 막상 기사를 읽어보니 “세상에 나가려고 인터뷰를 하는 게 아니라 안 나가려고 하는 것”이라고 했다. 언론소송, 그리고 세상에 나가지 않기 위한 단 한 번의 언론 인터뷰…. 서사가 포착되지 않는 선문답 같았다. 아, 지율은 그새 성불이라도 한 건가.

▲ 지난 10월23일 경향신문에 실린 지율 스님 기사.

 
 
‘초록의 공명’이 ‘도롱뇽 친구들’께…“조중동과 맞서고 있다”

그의 이름이 내 일상에서 다시 가뭇해지는 주기로 접어들 무렵, 이메일 한 통이 날아왔다. 11월 초순이었다. 보낸 이는 ‘초록의 공명’, 글 제목은 ‘도롱뇽 친구들께’였다. 지율 스님이 보낸 것이었다. 제목으로 보아 내게만 보낸 글은 분명 아니었다. 수신 대상은 누구누구일까? 나는 그가 수신 대상으로 삼은 이들의 범위와 심급이 문득 궁금했다. 나 같은 얼치기 인연에게도 보냈으니, 환경운동단체나 불교계처럼 천성산에 나보다 훨씬 깊게 닿아있는 축에도 마땅히 보냈을까? 그러나 이 쉬워 보이는 물음에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가 환경운동을 했고, 승려 신분라는 바깥세상의 분류방식과 그가 갖고 있는 분류방식이 꼭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느낌만 또렷했다.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망설이게 됩니다. 지금부터 저는 지난 몇 달 동안 제 마음에 거칠고 엉글게 엮여 있던 이야기들을 드려보려 합니다. 여러분들은 혹, 지난 10월 한 달 동안 중앙일보를 비롯한 몇 곳의 신문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실려 있던 ‘천성산 손실에 관한 정정, 혹은 반론 보도문’을 본 일이 있으신지요. 저는 여러분들이 무심히 보아 넘겼을지도 모르는 단 몇 줄의 반론 보도문을 싣기 위해 꼬박 1년 동안 몸에서 떨어져 나간 깃털이 허공을 떠돌듯 세상을 부유하며 다녔습니다.”

글은 그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숨어 지낸 게 아니라 세상을 떠다녔단다. 그것도 언론사를 상대로 몇 줄의 정정 보도문이나 반론 보도문을 받아내려고. 그는 “3000건이 넘는 천성산 관련기사를 정리하여 15개의 언론사에 3차례에 걸쳐 공문을 띄우고, 청와대 정책실을 비롯하여 170배나 과장된 천성산 손실 문제를 아무런 의심없이 인용하였던 대학과 연구소 등에 30통이 넘는 공문과 편지글을 띄웠다”고 했다. “세상에 나가려고 인터뷰를 하는 게 아니라 안 나가려고 하는 것”이라는 경향신문 기사가 생각 자락을 낚아챘다. 어쩌면 그는 온전히 숨은 적이 없었고, 숨을 수도 없었는지 모른다.

“바로잡습니다. 본지 2008년 2월25일자 E1면 ‘지표보다 현장 챙겨라. 립서비스 경제는 이제 그만’ 기사에서 천성산 터널공사가 중단된 기간은 10개월이 아니라 6개월이기에 바로잡습니다. 공사가 중단된 6개월 동안 시공업체가 입은 직접적인 손실은 145억원이라고 밝혀왔습니다.”(중앙일보 9월26일 2면)         

언론중재위원회에 여러 번 불려가 본 터라 이 정정 보도문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나왔을지 짐작이 갔다. 정정(반론) 보도문은 ‘객관적’으로도 짧지만, 정정(반론)을 요청하는 자에게는 어처구니없이 짧다. 되갚아주고 싶은 말은 언제나 차고 넘친다. 그러나 일단 중재로 가기로 합의되면 나머지 과정은 요구한 반론의 문장을 줄이는 압축 사출의 공정이다. 중재위에서 한 번, 그리고 언론사에서 또 한 번, 마른 수건 짜고 또 짜듯. 요청한 자에게는 마침내, 표현은 정확하되 뜻은 실리지 않은 문장이 제시되고, 합의가 요구된다. 그래서 난 정정 보도문을 기사 원문과 대조해가며 축자하듯 한 자 한 자 읽어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함부로 나태하거나 절망하기엔 언제나 너무 이르다  
 

▲ 11월 초순 지율 스님이 보낸 이메일 안의 사진.

답장을 썼다. 그는 내가 모르는 여럿에게 동시에 편지를 보냈겠지만, 내 수신 대상은 지율 스님으로만 지정됐다.

“스님과의 인연은 지난 2005년 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기억하시는지요? 스님께서 청와대 부근 민가에서 끝을 기약하지 않은 단식을 하실 때였습니다. 그땐 기자라는 직업을 떠나 스님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도 늘 경이롭고 가슴 먹먹했더랬습니다.… 스님 말씀마따나 끝이 어딘지 알 수 없고, 끝은 원래 없는 것인 듯, 천성산 문제도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스님께는 천성산이 그래 보입니다.… 저는 지금 <미디어스>라는 아주 작은 언론 전문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마침 스님께서 조선일보를 상대로 상징적인 소송을 하고 계시니, 미디어스 기자로서 맞춤한 핑계를 찾은 것 같습니다. 스님을 언제 어떻게 뵙고 말씀을 듣는 게 좋을지요? 기다리겠습니다.”

곧 답이 왔다. 언론 소송 문제로 종종 서울 나들이를 하니까 시간 되면 전화하겠다고 했다. 몇 주 뒤 낯선 번호가 내 전화기 액정화면에 떴다. 지율 스님이었다. 약속장소로 걸음을 옮기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리를 긁적였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이의 연락처를 찾으려고 명함첩을 뒤질 때처럼, 생각자락을 종잡을 수 없었다. 종로통 커피숍에 마주 앉았다. 그때까지도 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가 바랑을 열며 말문을 열었다. 그 안에서 2005년에 보았던 낡은 노트북과 두툼한 서류뭉치들이 나왔다. 그는 어제 그 자리에서 헤어졌던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일’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는 조중동의 보도에 맞서 송사를 벌이고 있었고, 조중동 보도의 재료였던 여러 수치를 조사해 숨은 거짓을 들추고 있었고, 조중동 보도를 다시 말로 퍼뜨리는 청와대나 정부의 관계자, 학자들의 날선 혀끝과 맞서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얘기에 빠져들어 개탄하고 분노하다가도, 문득 문득 그런 그에게서 소격감을 느꼈다. 그는 지난 일들을 얘기하다 고통스러운 듯 한숨을 폭 내쉬기도 하고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기도 했지만, 더 자주 미소 짓고, 더러 입을 가리고 웃기까지 했다. 그는 애초 세상을 등진 적도, 선정에 든 적도 없었고, 그의 들고남은 무척 가볍거나 그런 분별 자체가 애초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보다 덜 짓밟히고 덜 상처받은 이들이 오히려 희망과 절망의 롤러코스터를 탄 것이었다.

그는 긴 말 끝에, 기자로서 자신의 송사를 낱낱이 기록해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급하게 보도하거나 발표할 생각은 하지 말아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거짓으로 넘쳐나는 언어와 기록을 바로세우기 위해, 바로 세운 언어와 기록을 생명의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내게 손을 내밀어 동승하기를 권하는 것 같았다. 왜 하필 나일까. 두려웠다. 그처럼 끝간 데 없는,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는, 산출을 계량할 수 없는 일은 여지껏 한 번도 내 일이었던 적이 없었다. 나는 “애써보겠다”고 겨우 대답했다. 그건 지킬 수 있는 약속이거나 어길 수 있는 약속이 아니고, 다만 나 자신에 대한 암시와 다짐, 가르침의 복기 같은 것이었다. 함부로 나태하거나 절망하기엔 언제나 너무 이르다는.

어두운 시대, 밥 든든히 먹고 새해를 맞아야겠다

▲ 지율 스님의 ‘초록의 공명’(www.chorok.org) 첫 화면. 29일 0시32분에 들어가보니 ‘언론노조의 블랙투쟁에 함께한다’는 글이 올라와 있다.

그날 뒤로도 스님은 서울에 오실 때면 전화를 주신다. 마주보고 커피를 마시고, 이런저런 푸념도 나눈다. 귀한 분을 함께 모시고 올 때도 있다. 12월 들어서는 글 마감에 정신없는 시간에 대뜸 전화를 하셔서는 “배가 몹시 고프니 저녁을 먹자”고 하셨다. 저녁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달려나가 보니 <녹색평론> 김종철 선생님과 함께 와 계셨다. 그날도 법원에 다녀오셨다고 했는데, 그곳에서 일이 많이 헛헛하셨던가 보다. 350일 넘는 단식을 어떻게 견뎌내셨을까. 그는 밥 한 그릇을 달게 비운 다음 숟가락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다시 ‘일’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천성산이 곧 한반도 대운하예요. 이명박 정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운하를 파려고 할 거예요. 언론도 제대로 관심을 안 갖고 있는데, 그거 하려고 이미 법과 제도를 다 바꿔놓았어요. 토목공사에 대한 중앙정부의 인허가권을 거의 다 지자체로 넘겼어요.” 나 같으면 휘몰이로 했을 얘기를 그는 원고지에 글자를 채워가듯 또박또박 말로 옮겼다. 김종철 선생님이 지청구를 줬다. “스님, 소송 그만하세요. 우리나라 법원을 믿으세요? 책을 쓰세요, 책을. 아직 기억이 남아 있을 때. 남는 건 역사입니다.” 지율 스님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죠. 물론 책도 쓸 거예요. 연극도 만들어 무대에 올리고 싶어요. 호호.”

이 글은 일요일(28일) 밤, 국회 앞 ‘독재부활-MB악법 저지 긴급국민행동’ 집회 기사를 데스킹한 다음 완성했다. 날이 밝고 나면 ‘조중동방송’ 시대를 열 신문법·방송법 개정안이 날치기된 다음일지, 아니면 하루이틀 더 팽팽한 전운이 감돌지 지금은 알 수 없다. 한반도 대운하에서 이름만 바꾼 4대강 정비계획은 이미 예산이 국회를 통과된 상태다. 공교롭게도 지율 스님이 붙든 두 화두(언론과 생명)와 정확히 닿아 있다. 끝간 데 없는,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는, 산출을 계량할 수 없는 시간들이 2009년과 함께 찾아올 것이다. 2008년, 나는 들고남이 가벼우면서도 한 번도 제자리를 뜬 적이 없는 한 비구니를 다시 발견했다.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자세를 깨단케 하는 인연이었다. 밥 든든히 먹고 새해를 맞아야겠다. 또박또박.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