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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가 된 글

조선일보 향한 ‘짧은 칭찬, 긴 뒤끝’


성숙한 관중문화는 보면서 성숙한 집회문화는 왜 못보나? 
미디어스  안영춘 기자  jona01@mediaus.co.kr 
 
 
11일(토) 오후 사무실에서 혼자 사발면을 먹으며, 습관처럼 신문을 펼쳤습니다. 간식 먹을 때와 화장실 가서 근심을 풀 때가 평소 보기 힘든 신문 안쪽 면까지 살필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것도 당일치 신문 말고 며칠 지난 신문이 제격이죠. 이날은 하루 지난 10일치 <조선일보> 스포츠 면을 봤습니다.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 삼성-롯데 2차전 소식이 지면을 도배하고 있었습니다. 라면 면발을 건져 먹으며 신문을 꼼꼼히 읽어가다 그릇을 들어 국물을 마실 즈음이었습니다. 지면 한구석에서 학창시절 썼던 시내버스 회수권만한 크기의 작은 기사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 조선일보 10일치 24면.

‘관중이 투수에 ‘레이저’ 쏴 투구 방해’.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벌어진 해프닝을 전하는 가십성 스케치 기사였습니다. 상대 투수의 투구를 방해하려고 일부 롯데 팬들이 투수 눈을 향해 레이저 포인터를 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롯데 팬들의 관전과 응원이 유별난 건 자타가 공인하는 터라, 혀를 몇 번 끌끌 차고 대수롭지 않게 마지막 문장으로 넘어갔습니다. 마지막 문장에는 기사 전체를 감당하는 반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롯데 팬들은 레이저 발사 용의자를 향해 “집에 가, 집에 가”를 외치며 성숙한 관전 문화를 보였다.’

이 기사가 롯데 팬들의 관전 태도를 힐난한다고 이해하는 독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저 또한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마음 한쪽이 뿌듯하게 벅차오르는 걸 느꼈습니다. 지난 봄·여름 거리의 촛불집회에서 자주 봤던 모습이 떠올라섭니다. 위 기사의 문장구조에 대입해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보면 아마 이럴 것입니다.

 ‘대다수 시민들이 일부 과격 시위자들을 향해 “비폭력, 비폭력”을 외치며 성숙한 집회 문화를 보였다’.

이런 보도는 현상의 일부를 사태의 본질로 치환하는 악의적 보도와 대칭점 위에 서 있습니다. 조선일보의 10일치 스포츠 기사가 ‘일부 관중의 경기 방해’에만 초점을 맞췄을 경우를 가정해 보면 쉽게 대비될 것입니다. 조선일보의 이번 기사는 짧지만 균형감 있는 기사로, 저널리즘적 긴장감이 넘친다고 하겠습니다.

문제는, 조선일보의 이런 보도 태도가 스포츠 면 정도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아래는 촛불집회가 정점을 향해 치닫던 지난 6월8일 집회 소식을 다룬 6월9일치 조선일보 1면 기사와 경향신문 8면 기사입니다. 어느 쪽 기사가 보도 태도에서 지난 10일치 조선일보 스포츠면 기사와 가까울까요?

▲ 조선일보 6월9일치 1면.

  

▲ 경향신문 6월9일치 1면.


조선일보를 드물게 칭찬하고도, 뭔가 뒤가 잔뜩 무거운 이런 기분이 들지 않으려면 앞으로도 이런 기사를 조선일보 지면 전체에서 매일같이, 그리고 무척 오래 본 뒤라야 할 같습니다. 물론, 아주 어렵겠지만 도무지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