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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주 전 사장 “진실과 정의는 패배하지 않을 것”

 

첫 공판서 혐의사실 전면 부인…“세금소송 취하는 합리적 판단”
미디어스 안영춘 기자  jona01@mediaus.co.kr 
 
 
배임혐의로 기소된 정연주 전 KBS사장에 대한 첫 공판이 2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렸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2부(재판장 이규진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공판에서 정 전 사장은 모두 진술을 통해, “사장 재임 등을 위해 세금 소송을 취하해 KBS에 손해를 입혔다”는 검찰의 공소 내용을 전면 부인했다.

▲ 정연주 KBS 사장 ⓒ여의도 통신

정 전 사장은 “1심에서 승소해서 세금을 다 돌려받을 수 있었다면 그걸 포기하는 바보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며“세무 소송팀의 자체 분석과 회계법인의 의견을 종합한 결과, 세무 소송에서 KBS가 당장은 승소한다 하더라도 국세청이 추계과세 등의 방법으로 재부과를 할 수 있으므로 끝없이 소모적인 소송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정 전 사장은 “국세청과 협의해 마련한 조정안은 나에게 지극히 비판적이었던 강동순 전 감사가 지휘하던 KBS 감사실이 독자적인 판단과 법률 자문을 거쳐 동의했고, 최고 결정기구인 경영회의에서 통과되었고, 이사회에서도 자세히 논의되었다”고 덧붙였다.

정 전 사장은 “평생을 언론인으로 살아 왔으며,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언론의 자유, 언론의 독립, 그것이 바탕이 되는 민주주의의 가치”라며 “그랬기에 공영방송 KBS의 독립성을 담보하는 공영방송 사장의 임기를 지키는 일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생각을 했으며, 사임 또는 해임을 위한 온갖 정치적 압박에 굴복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검찰의 기소 방침은 미리 정해져 있었고, 나에게 전방위적으로 압박이 들어온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한다”며 “내 명예를 회복하고, 거짓과 불의가 판치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도 진실과 정의는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재판에 임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공판에서 변호인 쪽은 △국세청이 추계 조사방법에 의한 세액 재산정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상급심에서도 공사의 승소가 매우 유력했다 △전문적인 법무법인, 세무회계법인 등에게 검토를 의뢰할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등의 검찰 공소장 내용이 모호하거나 자의적이라며, 이에 대해 사실관계를 명확히할 것을 검찰 쪽에 요구했다.

정 전 사장은 2005년 6월 국세청을 상대로 낸 법인세 부과 취소 소송 1심에서 승소한 뒤 항소심을 진행하다 556억원만 환급받기로 국세청과 합의하고 소송을 취하해 회사에 1892억원의 손해를 끼친 혐의로 기소됐다.

다음 재판은 오는 30일 오전 10시에 열린다.

다음은 정 전 사장의 모두 진술 전문이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평생을 언론인으로 살아 온 사람입니다. 지금부터 38년 전인 1970년  동아일보사 기자로 첫 출발을 했을 때 저는 이런 소박한 꿈을 가지고 언론인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꿈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 방주 이야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40일 밤낮으로 비가 내리고 온 세상은 짙은 암흑에 묻혔습니다. 노아는 그 암흑의 세상이 끝났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비둘기 한 마리를 방주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얼마 뒤 비둘기는 나뭇가지 하나를 물고 방주로 돌아 왔습니다. 노아는 그 나뭇가지를 보고 암흑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노아에게 나뭇가지를 물어다 준 그 한 마리 비둘기가, 40일간 암흑으로 뒤덮인 노아 시대에 진실을 전해준 메센저로 보았으며, 언론이 마땅히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박정희 독재 시절, 그 암흑의 시대에 한 마리 작은 비둘기가 되자며 기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뒤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자유언론 운동을 하다 130여명의 동료들과 함께 1975년 봄 동아일보에서 강제축출되었으며, 1978년에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1년여 투옥되었고, 1980년 5.17 이후 긴급수배되어 1년 가까운 세월 동안 수배자 신세가 되기도 했습니다. 수배기간동안 나이 많으신 부모님께서 미국 형님네로 떠나셨고, 얼마 뒤 이국 땅에서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나시게 되어 저는 임종도 하지 못한 불효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1982년 말, 여덟 살, 여섯 살 된 두 아들을 데리고 아내와 함께 저도 미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6년 반 뒤 저는 텍사스주 휴스턴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으며, 바로 그 즈음 국민의 성금으로 창간된 한겨레신문 워싱턴 특파원으로 발령을 받아 다시 꿈에도 그리던 언론 현장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 뒤 11년 동안 워싱턴 특파원 생활을 하였으며, 2000년 6월 귀국하여 한겨레 신문 논설위원과 논설주간을 2년 9개월간 하다 2003년 3월 한겨레 신문을 떠났습니다.

그러다가 2003년 4월말 사회단체 추천으로 한국방송공사 사장 후보에 응모했으며, 한국방송공사 이사회에 의해 사장으로 뽑혀 제청과정을 거쳐 대통령에 의해 사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해 4월부터 전임 박권상 사장의 잔여 임기 2개월을 채운 뒤, 이사회 제청과정을 거쳐 6월 30일 사장으로 임명되어 3년간의 임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06년 11월 이사회 제청과 대통령 임명과정을 거쳐 다시 사장으로 임명되어 지난 8월 11일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해임될 때까지 한국방송공사 사장으로 재임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제가 말머리에 이처럼 살아 온 이야기를 한 것은 평생을 언론인으로 살아 왔으며,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언론의 자유, 언론의 독립, 그리고 그것이 바탕이 되는 민주주의의 가치라는 점을 먼저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랬기에 공영방송 KBS의 독립성을 담보하는 공영방송 사장의 임기를 지키는 일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생각을 했으며, 그래서 저의 사임 또는 해임을 위한 온갖 정치적 압박에 굴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에 대한 사임 압박은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번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직후부터 나왔습니다. "정연주 사장의 축출이 0순위"라는 이야기가 한나라당에서 나왔으며, 3월 26일에는 최시중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이 김금수 당시 KBS 이사장을 만난 자리에서 저의 사퇴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압박은 5월 들어 본격화했습니다. 최시중 방통위 위원장이 김금수 이사장을 5월 들어 3일과 12일 두 차례 만나 저의 사퇴 압박을 했고, 5월 15일에는 뉴라이트 전국연합 등 우파 시민사회단체에서 감사원에 국민감사 청구를 제출했으며, 바로 하루 전날인 5월 14일 KBS 전 직원인 조상운씨가 저를 배임죄로 검찰에 고발했습니다. 검찰 수사와 감사원 감사가 본격화되던 시기에 국세청에서는 KBS에 프로그램을 공급하던 외주제작사에 대한 세무조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 즈음 박재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은 <월간 신동아>와 가진 인터뷰에서 "새 정부의 국정철학과 기조를 적극 구현할 의지가 있는 사람이 KBS 사장이 되어야 한다"는 발언을 했습니다.

제가 검찰의 잇딴 소환을 받을 때의 상황입니다. 제가 개인회사 사장이었다면 검찰의 소환에 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소명을 하는 것이 저 개인에게 더 유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불응한 이유는 공영방송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지켜야 하는 상징으로서 KBS 사장의 책임감이 더 중요했으며, 공영방송 KBS 구성원들의 자존심과 자긍심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검찰은 이미 저에 대한 조사와 관계없이 기소의 방침을 정해놓았다는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수없이 보도되었습니다. 이미 방침은 정해져 있었으며, 그러한 방침은 당시 저에 대한 압박이 전방위적으로 있어온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저의 판단이었습니다. 해임된 다음날 검찰이 저를 체포하여 조사했을 때 묵비권을 행사한 것도 바로 이런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이 사건은 본 법정으로 넘어 왔습니다. 저는 적극적으로 당당하게 진실을 밝힐 것입니다. 이 법정에서는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며, 특히 지금 과거 권위주의 시대로 회귀하면서 위기에 놓여 있는 한국 민주주의에서 그 나마 마지막 보루로 남아 있는 것이 법정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2003년 4월말 사장으로 취임한 뒤 가장 큰 목표를, KBS 조직문화를  자율과 창의가 넘치는 수평적 조직으로 바꾸는데 두었습니다.  그래서 온갖 저항에도 불구하고 팀제를 도입하여 1200개 직위를 200개로 줄이는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이와 함께 의사 결정과정에서 집단의 지혜를 강조했습니다. 한 두 사람의 생각에는 한계가 있으며, 여러 사람이 모여서 의논하면 반드시 더 좋은 결론이 나온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민주주의의 꽃이 아니겠습니까.

구체적인 날자는 기억하지 못하겠으나 사장에 취임하던 해인 2003년에 이 사건의 고발인으로부터 세금소송의 현안을 보고받았습니다. 고발인은 저에게 KBS는 법인세 등을 납부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소송을 통해 잘못 납부된 세금 3천억원 이상을 환급받게 될 것이라고 보고했습니다. 저는 고발인이 매우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고발인을 격려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2004년 초, KBS가 세금소송에서의 구분경리 쟁점과 관련하여 609억원의 법인세를 추징당한다는 보고를 받게 되면서부터 저는 고발인이 보고한 바와는 달리 세금소송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비서팀에 세금소송 현안을 챙겨보라고 지시했고, 비서팀은 KBS가 세금소송에서의 구분경리 쟁점과 관련하여 2001년과 2003년에 이미 수백억원의 법인세를 추징당했고, 2004년 뿐 아니라 앞으로도 수백억원의 법인세를 계속 추징당하게 되어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고발인이 주도해 온 세금소송에 대해서도 KBS 내에 찬 반 양론이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그 때까지 엄청난 규모의 세금 소송을 고발인 혼자서 전담하고, 세금소송 관련 정보도 거의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되어 이 점이 제게는 아주 심각한 문제로 받아 들여졌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집단의 지혜, 많은 사람들이 논의와 토론에 참여하여 결론을 내는 것이 핵심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해온 터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T/F를 구성하여 시스템과 공동 논의를 통해 대응하고 다각적인 해결방안을 강구하도록 하였습니다. 다만 세무 소송 문제는 매우 복잡하고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사장이라도 구체적으로 개입할 여지는 거의 없었습니다.

2004년 5월 확대 개편된 세무 소송팀은 이후 자체 분석과 외부 회계법인의 의견을 종합한 결과, 세무 소송에서 KBS가 당장은 승소한다 하더라도 국세청이 추계과세 등의 방법으로 재부과를 할 수 있으므로 끝없이 소모적인 소송이 지속될 수밖에 없어 국세청과 협의하고 법원의 조정에 통해 합리적인 조세부과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국세청과 협의에 의해 마련된 조정안에 대해 저에게 지극히 비판적이었던 강동순 전 감사가 지휘하던 KBS 감사실도 독자적인 판단과 법률 자문을 거쳐 동의했습니다. 이 조정안은 KBS 집행기관의 최고 결정기구인 경영회의에서 통과되었고, 이사회에서도 자세히 논의되었습니다.

세무 소송을 조정에 의해 종결하지 않았다면 KBS는 아직도 소모적인 소송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국세청은 계속 추징금을 부과했을 것이며, 이 과정에서 정상적이고 안정적인 공영방송 운영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로 인한 손해는 고스란히 공영방송 서비스의 수혜자인 시청자, 즉 국민들이 안게 되고, 공영방송사와 국세청 사이의 계속되는 갈등과 분쟁으로 우리사회가 그 비용을 부담해야 했을 것입니다.


KBS는 두 개의 지상파 텔레비전 채널, <KBS 월드>라는 한 개의 국제 위성채널, 7개의 라디오 채널, 18개의 지역국, 7개의 자 계열사, KBS 교향악단, KBS 국악관현악단 등 어마어마한 규모의 방송 서비스를 하고 있습니다. 그 복잡한 회사를 사장 혼자서 독단적으로 운영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장 취임사에서도 밝혔습니다만 KBS 사장의 제왕적 권력을 해체하고 아래로 권력과 힘을 분산시키겠다는 철학을 가지고 KBS를 운영해온 저였기에 독단적인 운영은 저 자신을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해임된 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들을 최근 만났습니다. 그들이 한결같이 한 질문은 "1심에서 승소해서 세금을 다 받을 수 있었다는데 왜 그걸 포기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1심에서 승소해서 세금 다 받을 수 있었다면, 그걸 포기하는 바보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거짓과 불의가 판을 치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도 진실과 정의는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저는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이 법정에 임할 것입니다. 그래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배임)'이라는 무시무시한 죄목으로 저를 기소한 검찰과 고발인의 주장 하나 하나의 실체가 이 법정에서 밝혀지게 될 것으로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