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발표글

연평도 보온병의 추억과 윤 대통령의 무지

‘연평도 포격 사건’ 이튿날인 2010년 11월24일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 등이 연평도 주택가에서 보온병을 들고 ‘포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와이티엔(YTN) 화면 갈무리

2010년 11월23일 오후 2시34분 북에서 쏜 포탄 수십발이 연평도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초등학생들은 하굣길이었고, 어린이집 원생들은 낮잠 시간이었다. 바닷가에서는 주민들이 굴을 따고 있었다. 교전은 1시간 남짓 이어졌다. 우리 쪽은 민간인 2명과 군인 2명이 숨졌다. 주민 80%가 여객선과 어선에 몸만 싣고 피난길에 올랐다. 민간 거주지역이 공격당하는 사태는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 이래 처음이었다.

이튿날 입도한 한나라당의 안상수 대표는 폐허가 된 주택가에서 검게 그을린 원통형 물체 2개를 손에 들고 섰다. “이게 포탄입니다, 포탄!” 예비역 육군 중장인 황진하 의원은 포병여단장 출신답게 “이게 76㎜ 같고, 이거는 아마 122㎜ 방사포”라며 아는 체했고, 공군 중위로 전역한 안형환 대변인도 “곡사포 맞네요, 곡사포네 곡사포”라고 거들었다. 이들이 자리를 뜬 뒤 원통형 물체는 보온병으로 판명됐다.

국회의원 세명의 큰소리는 우스갯거리로 소비되고 말았지만, 실은 전투(나아가 전쟁)란 무엇인지를 사실감 넘치게 보여준 것이었다. 영화 <품행제로>(2002)에서 태권도부원들을 일당백으로 먼지처럼 날려버렸다는 전설의 고교 싸움꾼 중필(류승범)이 막상 숙명의 라이벌과 일전을 치를 때 막싸움의 리얼리즘을 시전했듯이, 포병여단장 출신 베테랑이 보온병을 포탄으로 오인한 것 또한 전투(전쟁)의 판타지를 지우는 리얼리즘이었다.

 

연평도 보온병은 12년 하고 한달 만에 석모도 새떼로 돌아왔다. 새떼를 북의 무인기로 오인한 군이 전투기를 출격시켰고, 그 전투기는 다시 북의 무인기로 오인돼 지방자치단체가 주민들에게 긴급 재난 문자를 보냈다. 전날엔 북의 무인기들이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상공을 휘젓다 돌아갔고, 우리 군의 경공격기 한대는 대응 출격하다 곧장 추락했다. 그러나 이틀에 걸친 좌충우돌 또한 기겁할 일보다는 ‘품행제로식’ 리얼리즘의 귀환에 가까웠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2월29일 대전 유성구 국방과학연구소를 방문해 무인기 개발 현황 전반을 점검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권위 있는 다큐멘터리를 봐도, 매끈한 전쟁 따위는 없다. 유명 지휘관의 판단도 빗나가기 일쑤다. 신중한 전략가였던 영국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은 1944년 9월17일 ‘마켓가든 작전’에 들어갔다. 나흘 뒤 라인강 방어선을 뚫고 독일로 입성해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을 끝낼 계획이었다. 그의 조바심은 1만70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연합군 안에서 이런 일은 드물지 않았고, 냉정하게 말해 2차대전 승리는 ‘운칠기삼’이었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전쟁에 정작 무지하다. 그것이야말로 전쟁의 가장 위험한 속성이다. 인류가 유구히 발전시켜온 거대한 폭력 기계는 언제부턴가 인간의 관리와 통제 역량을 초과했고, 전쟁의 전개를 가지런히 내다보는 것도 더는 가능하지 않다. 무지 가운데 가장 큰 무지는 무지하다는 사실에 무지한 것이다. 호전주의적 입을 가진 이들일수록 더욱 심하고, 그 입이 최고권력자의 것일 때 재앙에의 무지(불확실성)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윤석열 대통령은 북 무인기를 격추하지 못한 것에 격노했다. 하지만 책임을 “2017년부터 무인기 드론에 대한 대응 노력과 전력 구축이 제대로 되지 않고 훈련이 전무했다”며 문재인 정부로 돌리고, 자신은 “드론 부대 설치를 최대한 앞당기겠다”고 공언했다. 군 통수권자인 그가 설령 2018년에 이미 드론 부대가 창설됐고 육군에만 3000여대의 각종 무인기가 있다는 걸 몰랐다 해도, 국군의 날 사열에서 “열중쉬어” 구령을 안 내린 것만큼이나 사소한 무지다.

 

윤 대통령은 북에서 무인기 1대 내려오면 2~3대 올려 보내고, 북한에 핵이 있어도 주저하지 말고 응징하라고 지시했다. 혹여 무인기와 핵무기를 동렬로 인식한 데서 나온 것이라면 위험천만한 무지가 아닐 수 없다. 김정은 조선노동당 총비서는 이 발언을 겨냥한 듯 신년사를 갈음하는 전원회의 보고에서 “남조선 괴뢰들이 우리의 명백한 적으로 다가선 현 상황은 핵탄(핵무기) 보유량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연평도 포격 사건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스마트한 영상으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전쟁의 참상과 함께, 전쟁의 발화점이 그토록 낮은지조차 모를 만큼 우리가 무지하다는 걸 사실적으로 일깨웠다. 2023년 새해, 우리의 생존을 위해 다시금 그 리얼리즘이 더없이 절실해졌다.

 

※ <한겨레> ‘아침 햇발’에 실린 글입니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74235.html?_fr=mt5 

 

연평도 보온병의 추억과 윤 대통령의 무지 [아침햇발]

안영춘 | 논설위원 2010년 11월23일 오후 2시34분 북에서 쏜 포탄 수십발이 연평도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초등학생들은 하굣...

www.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