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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희생자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서울 용산구 이태원 참사 현장에 놓인 조화들. 연합뉴스

죽음의 해석은 다분히 사회적인 ‘배치’다. “호상입니다”라는 조의에 망자의 사전동의가 있을 리 없다. 사회의 암묵적 합의가 있을 뿐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언론 보도다. 장삼이사의 극단적 선택은 신병 비관, 실연, 생활고, 수사 압박, 입시 실패 등 정형화된 선택지 중 하나에 기필코 배치된다. 물론, 모든 죽음을 낱낱이 해석하기란 불가능하다. 타자의 죽음 앞에 가로놓인 실존의 강을 건너가는 것 또한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고 타자의 죽음을 산 자의 감정으로만 처리하면서 그걸 애써 ‘애도’라 부를 수도 없는 일이다.

 

실의에 빠진 돈키호테를 향해 산초는 “슬픔은 짐승이 아닌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슬픔이 지나치면 사람도 짐승이 돼버린다”며 나무란다. 진정한 애도에는 멜랑콜리(슬픔과 우울)를 넘어서려는 정동이 있다. 애도는 죽은 자에게 시도하는, 얼핏 무망해 보이는 ‘말 걸기’다. 왜 말을 걸어야 하는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도 삶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에게 말을 거는 건 죽음에 깃든 삶의 이야기를 들어 복원하고자 함이다. 그제야 산 자의 자의로 죽음을 배치하지 않고, 실존의 강을 건너기 위한 배를 띄울 수 있다.

 

참사에 의한 희생은 개별적인 이야기마저 넘어선다. 정치적 맥락의 죽음이다. 슬퍼만 해서는 죽음의 원인을 사인화의 굴레에 가두고 만다. 책임자들을 처벌한다고 정의가 온전히 복원되지도 않는다. 참사의 배후에 죽음을 강제하는 체제가 있기 때문이다.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은 체제의 거대한 구조 앞에서 대면해야 한다. 희생자들에게 정당한 발언권을 제공하고 구술을 채록하는 것, 산 자들의 세계에 죽임의 힘이 작동하는 구조적 맥락을 가시화하고 전복하려는 것까지가 참사에 대한 애도의 전 과정을 이룬다.

 

그 과정이 순탄할 리 없다. 세월호 참사 이후 체제 지배세력의 집요한 방해를 뚫고 온갖 우여곡절을 거치며 진상 조사 활동을 벌인 시간이 8년 남짓이다. 지금이 그 시간보다 고통스러운 건 뒤늦은 자각 탓이다. 이태원 참사는 긴 애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안전한 체제를 향해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음을 가혹하게 증명했다. 애도의 과정은 충분하지 못했고, 결과도 미완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애도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길에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걸림돌이 숱하다. 우리의 발부리는 무엇에 걸린 것일까.

 

‘유사 애도’는 애써 식별해야 보인다. 그나마 윤석열 정부가 ‘국가애도기간’을 정하고 슬픔 이외의 행위를 금지한 ‘탈정치화 기획’ 따위는 꼼수가 빤히 보인다. 지배 시스템 안에 내장된 자기지시적 원리를 찾는 건 훨씬 어렵다. 시스템의 힘은 자신이 정상작동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착시효과에 있다. 정작 시스템을 장악한 건 정상작동을 못 하게 하는 시스템 내부의 ‘반시스템’이다. 이태원 참사 이후 날마다 드러나고 있는 (타락한) 관료주의를 보라. 그런데도 시스템은 해법마저 시스템 내부에서 찾도록 회로화돼 있다.

 

우리의 정동이 그 회로에 갇혀 있는 한, 애도의 완성은 요원하다. 지난 8년 남짓 우리가 그 회로를 꿰뚫어보려고 해왔는지 의문이다. 가령, 세월호의 침몰을 음모론으로 재구성하려는 일각의 집요한 시도는 죽임의 시스템을 냉철하게 응시하려는 애도의 이성을 흐려놓지 않았는가. 시스템의 악마성 대신 실제 악마를 색출하고자 하는 욕망은 이미 회로화된 욕망이 아니었나. 그리하여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담아야 할 수첩은 자기독백으로 채워졌고, 세월호 참사가 이태원 참사로 회귀하는 걸 막을 수 없었던 것 아닐까.

 

이태원 참사 희생자의 명단 공개에 어떤 애도의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에 대한 추궁도 마찬가지다. 명단 공개의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는 것은 순수한 슬픔 이상을 금지하는 것과 동일한 구조 위에 있다. ‘유족들의 동의를 받았느냐’는 질문도 본질은 아니라고 본다. ‘명단 공개는 희생자들에 대한 말 걸기인가’로 질문은 전환돼야 한다. 생전 공적으로 통용된 이름 몇자 호명한다고 말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자칫 죽음에 신병 비관, 실연, 생활고, 수사 압박, 입시 실패를 배치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기왕 이름을 불렀으면 애도의 대화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희생자들을 죽임의 시스템 회로 밖으로 구조해낼 수 있을 때까지.

 

※ <한겨레> ‘아침 햇발’에 실린 글입니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68036.html

 

희생자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아침햇발]

안영춘 | 논설위원 죽음의 해석은 다분히 사회적인 ‘배치’다. “호상입니다”라는 조의에 망자의 사전동의가 있을 리 없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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