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발표글

숨그네와 홀로도모르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헤르타 뮐러의 영롱한 장편소설 <숨그네>는 1945년 1월 루마니아의 한 소도시에서 시작된다. 독일계 17살 소년 레오폴트 아우베르크는 소련 강제수용소 이송자 명단에 오른다. 소년은 축음기 상자를 트렁크 삼아 아버지의 먼지막이 외투, 할아버지의 우단 깃이 달린 도회풍 외투, 삼촌의 니커보커 바지(무릎 아래 부분을 졸라맨 짧은 바지), 이웃 아저씨의 가죽 각반, 고모의 초록색 양모 장갑, 자신의 포도주색 실크 스카프를 꾸려 넣는다.

 

이 무계통의 물건들이 보여주는 건, 소년은 물론 그에게 뭐라도 쥐여 보내려는 누구도 강제수용소가 어떤 곳이고 거기서 무슨 일을 겪을지 전혀 가늠하지 못하는 짙은 막막함이다. 결국 물건들의 쓸모는 굶어 죽거나 얼어 죽지 않으려고 수용소의 러시아인 감독자에게 상납하는 데 국한된다. 소년은 꼬박 5년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네처럼 흔들리다 풀려난다. ‘절대(권력의) 영도는 말해질 수 없다’는 깨달음과 함께.

 

소설은 개인사로 짜였지만 역사와 실존 인물에 터하고 있다. 스탈린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동맹국 일원이던 루마니아를 1944년에 점령한 뒤, 이듬해 1월 “나치가 파괴한 소련을 재건한다”며 17~45살 독일계 루마니아인을 남녀 불문하고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뮐러의 어머니도 5년간 수용됐다. 소설 속 주인공은 뮐러의 동료 작가인 오스카르 파스티오르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숨그네>를 연상시키는 건 강제수용소가 우크라이나에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숨그네>는 1932~1933년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홀로도모르’(기아에 의한 살인)와 여러모로 겹친다. 홀로도모르는 집단농장화에 따른 생산력 감소와 극심한 흉작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이 곡물의 씨앗까지 징발하고 외부 이동마저 막아 우크라이나인 수백만명을 집단 아사로 몰아넣은 대참극을 일컫는다.

 

곡물을 수탈해 사회주의 산업화를 앞당기고, 강제노동을 시켜 나치의 피해를 복구하라는 스탈린의 ‘절대 영도’는 죽임의 언어였다. ‘탈군사화’와 ‘탈나치화’라는 언어도단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은 스탈린의 후예다운 모습을 유감없이 과시한다. 이에 맞선 전세계인의 ‘반전’ 목소리가 우렁우렁 공명해 우크라이나인들이 오늘이라도 피난 짐꾸러미를 풀 수 있기를 기원한다.

 

※ <한겨레> ‘유레카’에 실린 글입니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32874.html

 

[유레카] 숨그네와 홀로도모르 / 안영춘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헤르타 뮐러의 영롱한 장편소설 <숨그네>는 1945년 1월 루마니아의 한 소도시에서 시작된...

www.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