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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국민 약탈’과 ‘죽창가’

‘약탈’(掠奪)의 ‘약’은 ‘노략질’을 뜻한다. 떼 지어 몰려다니며 사람을 해치거나 재물을 강제로 빼앗는 짓이다. ‘수탈’(收奪)은 어떻게 다를까. 강제성에서는 약탈과 다르지 않으나, 물리적 직접성에서 차이가 난다. 약탈은 완력이 가닿는 만큼만 빼앗을 수 있다. 수탈은 제도의 힘을 빌린 빼앗음이다. 도달 범위는 직접적 물리력이 아닌 제도 설계에 의해 결정되기에 약탈보다 광대하다. 약탈은 눈앞에서 사람을 해치기도 하지만, 수탈은 직접 손에 피 묻힐 일이 없다.

 

왜구는 약탈했고, 일제는 수탈했다고 비교하면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둘의 차이를 가려서 쓰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은 듯하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대선 출마 선언을 하면서 ‘국민 약탈’이라는 생경한 표현을 썼다. 문재인 정부에 왜구 이미지를 덧씌우려는 의도가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국가권력이 국민을 약탈하는 건 왜구가 조선 백성한테 군포 걷는 것 못지않게 부조리하다. 만약 윤 전 총장이 종합부동산세 인상과 공시가격 현실화 등을 ‘국민 수탈’로 본 것이라면, ‘주거 약자’는 아예 국민으로 여기지 않은 것이 된다.

 

‘국민 약탈’이라는 표현이 일부 유튜버들 사이에서는 빈번하게 쓰인다고 한다. 김광일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4월29일 유튜브 방송 ‘11시 김광일 쇼’에서 이건희 회장 유족들의 미술품 기증을 두고 ‘기부를 가장한 약탈’이라고 한 데서도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재용 부회장에게 억울한 죄를 씌워 돈으로 환산하기도 어려운 미술품을 빼앗았다는 건데, 그런 인식대로라면 문재인 정부는 왜구보다도 사납고 악한 무리가 아닐 수 없다.

 

윤 전 총장의 ‘화용론’을 몇 글자 출마 선언문만으로 파악하는 건 섣부르다. 다만 문재인 정부 대일 외교를 ‘죽창가’에 빗댄 데서 그의 약탈에 대한 거부감을 짐작해보게 된다. 동학혁명군이 죽창을 들며 외친 주장에는 탐관오리 처벌과 일본 세력 배격에 토지 재분배까지 포함돼 있었다. 동학혁명군에게 ‘토지 재분배’가 만석꾼에게는 ‘약탈’이었을 터이며, 만석꾼의 견해는 100여년 뒤 극우 유튜버 다수에게 전승됐다. 윤 전 총장이 유튜브를 얼마나 즐기는지 궁금하다.

 

한편, 윤 전 총장 장모가 1심 유죄 판결을 받은 죄는 ‘국민의 돈’(건강보험 재정)을 ‘편취’(남을 속여 빼앗음)한 것이다. 이거야말로 ‘국민 편취’ 아닌가.

※ <한겨레> ‘유레카’에 실린 글입니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02043.html

 

[유레카] ‘국민 약탈’과 ‘죽창가’ / 안영춘

‘약탈’(掠奪)의 ‘약’은 ‘노략질’을 뜻한다. 떼 지어 몰려다니며 사람을 해치거나 재물을 강제로 빼앗는 짓이다. ‘수탈’(收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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