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발표글

배스킨라빈스 광고와 나의 펜스룰

점식 식사 나오기를 기다리던 30대 초반 남성 후배가 대뜸 “요즘 가장 뜨거운 이슈가 뭔지 아느냐”고 물어왔다. “글쎄, 판문점 북-미 정상 회동 아니면 미-중 무역전쟁?” 내가 찬 공이 골대를 비껴갈 거라 짐작은 했으나, 후배 표정이 빠르게 변하는 걸 보니 이미 성층권 밖까지 날아가고 있는 공의 궤적이 눈앞에 그려졌다. “엘라 그로스인데요.” 처음 듣는 행성 이름이었다. 후배한테서 ‘배스킨라빈스’라는 이름을 마저 듣고 나서야 일주일 전쯤 읽었던 기사가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이 둘째 단락에서 사건의 개요를 옮기고 갈지 말지 나름 고민이 깊었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기라고 여기는 이들이 “티엠아이”(TMI, 투 머치 인포메이션)라고 지청구할 게 빤하긴 해도, 어떤 이에게는 이 글을 읽어가는 데 꼭 필요한 사전 정보일지도 모를 일 아닌가. 내 최종 판단은 ‘궁금하면 나처럼 기사를 찾아보면 되지 않겠느냐’였다. 궁금하지 않다 해도 하는 수 없지만, 요즘 가장 뜨겁다는 이슈를 외면하는 건 우리 사회에 대한 무관심의 방증이라고 굳이 ‘아재 잔소리’를 보태련다.

디지털 부서에서 보고하는 ‘오늘의 디지털 이슈’를 보면 내가 사는 세상과는 다른 또 하나의 세상이 있지 않은가 싶을 때가 많다. 이슈 감각이 퇴화하는 것 같아 내심 걱정되면서도 대개는 피식 웃고 마는데, 이번 경우는 자못 달랐다. 어떤 이들에겐 호르무즈 해협의 군사적 긴장보다 미성년 여성이 등장하는 아이스크림 광고의 선정성 또는 성적 대상화 여부가 더 심각한 이슈임이 틀림없었다. 후배의 언질대로, 논쟁 구도는 다분히 성 대결 양상으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여성들 글을 보니 밑줄 긋고 싶은 대목이 적잖았다. 문제의 광고에서 선정성이나 성적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남성들의 주장에, 남성의 주관적이고 즉자적인 느낌이 광고의 성적 대상화 여부를 판별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반박한 것이 대표적이다. 성희롱 여부를 판단할 때 피해자의 주관적 사정을 고려해야 한다는 기준과도 닿아 있는 듯했다. 남성 아이돌이 등장하는 과거 같은 제품 광고에서는 입술을 클로즈업하지 않았다고 짚은 데서도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후배를 비롯해 젊은 남성 위주로 추정되는 반응들도 조건반사로만 보긴 어려웠다. 광고에 대한 문제제기 성격이 지나치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는 성적인 함의를 맥락으로 독해하는 것과 실제 성적인 감각을 구분하려는 욕구가 엿보였다. 이 광고를 아동 성범죄 문제와 직간접적으로 연결하는 일부 담론에 거부감이 도드라지는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사실 아무도 “이라크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장 보드리야르의 경구를 역사학적 진술로 독해하진 않지 않는가.

이슈의 양상은 모델의 엄마가 등장함으로써 한층 복잡해졌다. 한국 누리꾼들이 딸의 소셜네트워크 계정에 몰려가 ‘애정 어린’ 조언을 쏟아낸 모양이다. 엄마는 딸의 계정에 “전투적인 비난이 슬프다”며 “이것은 ‘엘라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걸 당장 멈추라”고 글을 올렸다고 한다. 하나의 존재는 수많은 정체성이 교차하는 장소이며, 이를 민감하게 수용하는 것이 페미니즘이라고 알고 있다. 이들 모녀에게 ‘콩쥐 팥쥐’ 우화의 단일 정체성을 씌우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본다.

오늘날 ‘성차’를 해석하는 데는 크게 사회구성주의적 관점과 진화생물학적 관점이 있다. 주류 페미니즘이 채택하는 사회구성주의적 관점은 성차가 사회문화적인 영향을 받아 후천적으로 형성된다고 보는 반면, 뇌과학자들이 주도하는 진화생물학적 관점은 타고난 유전자와 호르몬 같은 생화학적인 영향을 받는다고 본다. 양쪽은 서로를 비판하지만, 평행선만 긋지는 않는다. 서로를 참조하며 진화한다. 문제의 광고에 대해서도 두 관점을 함께 참조하며 논쟁할 수는 없을까.

이 이슈가 제때 내게 사건화되지 못한 건 대한민국 50대 남성의 성인지성과 감수성의 한계 탓이리라. 그런데도 서툰 생각을 용기 내어 드러내는 이유는 하나다. 어느덧 나를 둘러친 소통의 펜스룰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내 얘기가 안드로메다로 가더라도 참고 대화할 이, 누구 없소?

 

※ <한겨레> ‘아침 햇발’에 실린 글입니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901103.html

 

[아침 햇발] 아이스크림 광고와 나의 펜스룰/ 안영춘

안영춘 논설위원 점식 식사 나오기를 기다리던 30대 초반 남성 후배가 대뜸 “요즘 가장 뜨거운 이슈가 뭔지 아느냐”고 ...

www.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