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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조개 밀려오는데 해일 줍냐

내가 꼽은 올해의 말은 “조개 밀려오는데 해일이나 줍고 있냐”다. 해가 바뀌려면 며칠 남았지만 그 사이에 경쟁상대가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이 말의 첫 발화자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사실 알 필요가 없다. 문장 구성 자체에 카피레프트의 속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의 작품을 간단히 조롱해버리는 그래피티 아티스트 뱅크시의 작품에 저작권을 묻지 않는 이치와 같다.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격투기 기술의 짜릿함을 거저 즐기기만 하면 그만이다.

“해일 밀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냐.” 처음 이 말을 한 사람이 누군지는 잘 알려져 있다. 국회의원과 장관을 지냈고, 지금은 작가와 방송인으로 맹활약 중인 50대 엘리트 남성이 저작권자다. 대통령 선거 전에 자신이 이끌던 정당에서 일어난 성폭력 사건 처리 논란을 두고 했던 이 말은, ‘11월 혁명’이라고까지 일컫는 지금 광화문광장 촛불집회에서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역사적 대의 앞에서 성희롱이나 여성비하 표현을 문제 삼는 것이 얼마나 몰역사적이냐는 거다.

특정 세력이 영구 지배를 꾀하는 것을 우리는 “독재”라고 부른다. 그것을 뒤집는 게 “독재 타도”다. 지금 광장에서 촛불로 타오르는 염원도 바로 그것이다. 모든 언어는 정치적이다. 주류의 언어일수록 권력과 위계가 낱말과 문장 하나하나에 촘촘히 배어 있다. 그런 언어가 도전받지 않는 것이야말로 ‘말의 독재’다. 그런데 이토록 간단하게 문장을 도치시켰더니 ‘말의 혁명’이 일어났다. 독재자를 끌어내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이들이 한데 모인 곳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더욱 빛난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것과 달리, 광장 내부는 그렇게 단일하지도 않고 평등하지도 않다. 참가자 규모가 크면 클수록 차이도 더욱 빽빽하게 웅숭그린다. 그 차이는 구조적인 차별로 이어지기 십상이지만, 대의의 판타지에 가려 은폐되고 만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대의를 ‘쟁취’한들, 그 안에는 우리가 그토록 넘어서고자 했던 낡은 지배질서가 여전히 러시아 목각인형 마트로시카처럼 겹겹이 채워져 있다. 과정의 중요성은 정치적 올바름에만 있지 않다. 과정이 결과의 질을 좌우하는 것이다.

광장에서 쓰레기를 줍고 경찰버스에 붙은 스티커를 떼는 걸 두고 ‘착한 시민 콤플렉스’ 논쟁은 있었지만 “해일 밀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냐”고 나무랐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쓰레기 줍고 스티커 떼는 이들은 광장의 주류에게 불편한 존재가 아니지만, 차별을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이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대의를 앞세우는 우뚝한 목소리는 정작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은폐하는 복화술이고, 이에 대한 처방은 ‘말의 전복’이다. “조개 밀려오는데 해일 줍냐.”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범국민대회에 참석했던 청각장애인 설혜임씨가 30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박근혜는 하야하라!’라는 구호를 수화로 하고 있다. 맨 왼쪽 사진은 ‘박근혜’, 둘째와 셋째 사진은 ‘하야’, 넷째 사진은 ‘하라’이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얼마 전 광화문광장 집회에 참가한 농인(청각장애인)을 인터뷰했다. “가슴이 팡팡 울렸어요.” 그는 초대형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를 귀가 아닌 가슴의 진동으로 느꼈다고 했다. 100만 명의 함성으로 떠나갈 듯한 그곳이 누군가에겐 완벽한 ‘고요의 바다’라는 것을, 그런 누군가가 나와 함께 그곳에서 간절한 희망을 소리 없는 함성(수화)으로 내지르고 있음을, 그들이 바라는 세상은 청인(비청각장애인)이 바라는 세상보다 더 평등하고, 그래서 더 훌륭하고 아름다운 세상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집회 주최 쪽이 농인을 위한 수화 방송에 인색하다며 안타까워했다. 지금 광장에는 보행 장애인을 위한 화장실 한 칸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광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고스란히 우리의 미래다. 누군가는 차별과 억압에 맞서 목소리를 높이고, 더 많은 이들이 민감하게 받아들여 시정을 요구하고 바로잡는 것은 우리의 미래를 일구는 일이다. 닥쳐오는 해일이 거셀수록 조개를 열심히 주워 모아야 한다. 지금 여기가 우리의 로두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