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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안철수와 애도의 정치학

지난달 30일 오후 지하철 안전문 유지보수 업체 직원 김아무개군이 전동차에 끼여 숨진 서울 광진구 구의역 9-4 승강장에서 시민들이 추모 집회를 하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열아홉 살 청년 노동자가 지하철역 안전문(스크린도어)과 열차 사이에 끼어 숨졌다. 공기업의 하청업체 노동자였다. 본사 정규직이었다면 참사를 당하지 않았을 거라는 주장은 합리적이다. 그에게는 최소한의 안전을 위한 매뉴얼조차 애초 누릴 수 없는 사치였다. 그의 신분이 곧 ‘사회적 사인’이었음을 그의 유품이 된 사발면은 증명한다. ‘위험의 외주화’는 위험한 노동을 외부로 떠넘기는 자본의 행태뿐 아니라, 외부로 떠넘긴 노동은 위험해질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체제 원리로도 해석해야 옳다.


수많은 이들이 자기 일처럼 슬퍼하고 있다. 우리가 날마다 이용하는 공중시설에서 벌어진 사고라는 점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가 죽임을 당하는 순간과 죽음 직후의 이미지가 너무 낭자하게 연상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불안정 노동에 허덕이는 대다수 노동자들에게 저 참극은 결코 남의 일일 수 없는 현실이야말로 이 슬픔의 뿌리다. ‘노동자를 밀어 넣어 짓뭉개는 체제’가 더는 은유일 수 없다는 경악스러운 사실에서 전해오는 크나큰 통증이기도 하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SNS에 애도의 글을 올렸다가 역풍을 맞았다.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 모른다”는 표현에서 악의성을 찾는 건 무리라 해도, 그가 불안정 노동과 이번 참극의 구조적 연관성에 대해 무지한 건 분명하다. “진의와 다르게 해석되었다”는 뒤늦은 해명이 처음 말보다 번지수가 더 크게 빗나간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가 “여유”라고 쓰더라도 노동하는 이들은 “예외”라고 읽을 수밖에 없는 ‘사회적 문맥’을, 늘 여유 있고 그래서 예외인 그는 모른다.


그러나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마르크스의 오랜 경구를 인정하더라도, 불안정 노동에서 예외인 이들이 모두 안 대표 같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가 열아홉 살 청년 노동자의 죽음에서 슬픔을 느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런데도 의도와 상관없이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참극의 구조에 무지했던 탓만은 아니다. 그의 말(글)실수에는 진짜 이유가 따로 있다. 자신은 저 문제와 관련이 없고,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저런 비극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다시 말해 언제나 자신을 예외로 간주하려는 태도다.


슬퍼하는 마음과 애도는 상어와 고래만큼 다르다. 애도를 표시한다면서 오히려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을 가해하는 경우를 우리는 세월호 참사 이후 줄기차게 보아왔다. 대통령부터 고위 관료와 정치인들까지 그토록 터무니없는 발언과 행동을 한 까닭은 그들이 그 비극을 즐기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예외적 입지’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권의식을 내면화하고 있는 이들에게서 말(글)실수가 집중해서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여기서 애도는 산 자들이 자신의 슬픔을 정리하는 통과절차다.


그런 애도에 죽은 자의 자리는 없다. 죽은 자들에게 말을 걸지 않는 애도는 독백에 불과하다. 철학자 김진영은 “죽은 자들과 어떻게 새로운 관계를 맺을 것이냐, 죽은 자들에게 어떻게 정의로운 관계를 만들어줄 것이냐를 두고 죽은 자들과 대화하는 것이 애도다”라고 말한다. 그는 그것을 ‘정치적 애도’라고 부른다. 애도는 죽은 자와 대화하고 죽은 자의 뜻을 산 자들의 세상에서 실현하려는 정치적인 의지이자 실천인 셈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위치에서 벗어나 죽은 자에게로 다가가야 한다.


쉬운 애도는 애도가 아니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정언명제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안철수 대표의 문제는 ‘태도 불량’의 문제다. 나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지 되돌아보게 된다. 열아홉 살 청년 노동자의 죽음을 나는 정치적으로 애도하고 있는가.


* <방송대신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