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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내성천의 스님과 먹황새

이제 내성천에 드는 일은 풀더미 한가운데 갇히는 일이다.그 안에서는 모래도 물길도 보이지 않는다.

오랜만에 내성천에 다녀왔다. 늦가을 장마에 비가 오락가락했지만, 화창한 봄날이었다 해도 을씨년스럽기는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지금 내성천은 폐허다. 강도 그렇고, 강마을도 그렇다. 지난봄과도 또 달랐다. 일행이 찾아간 동호마을(경북 영주시 평은면)에서는 중장비들이 동원돼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를 부수고 있었다. 중장비 소음이 벌겋게 깎인 산자락에 튕겨 텅 빈 마을과 들녘으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수몰 예정 지역인 그곳에는 지율 스님과 주민 두 사람이 아직 버티고 있다.

내성천은 경북 봉화에서 발원해 영주와 예천 땅을 셀 수 없이 굽이돌아 낙동강 본류로 들어가는 100여㎞의 사행천이다. 나는 여러 해 그 물길을 시시때때로 답사했다. 이태 전만 해도 상류부터 최하류까지 바위 하나 찾아보기 힘든 고운 모래 천지였다. 외지에서 온 아이들은 낯선 비경 앞에서 “바다다!”고 외쳤다. 하지만 세계적으로도 진귀한 이 모래강은 어느덧 자갈밭으로 변했고, 그 위로 잡풀만 무성하다. 4대강 사업 한다고 낙동강 바닥을 준설한 뒤 이곳 모래가 본류로 급격히 쓸려 내려간 데다, 영주댐 공사를 하면서 물길마저 막히자 전구간의 시스템이 망가져버린 것이다.

지율 스님은 영주댐 건설 소식이 들려올 무렵 이곳으로 들어와, 5년 전부터는 아예 강가에 텐트를 치고 산다. 무더위와 혹한을 견디며 강의 변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면밀히 기록했다. 그 사이에도 삽질은 근면성실하게 진행돼, 수몰 예정 지역은 2년 전부터 산이고 들이고 어디가 어딘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파괴되었다. 어느덧 텐트도 색이 바랬다. 얼마 전엔 그 텐트 탓에 피해가 극심하다며, 수신 주소가 ‘동호 강변’으로 적힌 정부의 민·형사 소장이 스님 앞으로 송부됐다.

지율 스님이 인터넷으로, 영화로 기록을 퍼뜨리면서 종교인들부터 밀양 아이들, 제주 곶자왈 아이들까지 수많은 이들이 강을 보러 다녀갔다. 다들 모래강의 아름다움에 반하고 모래강의 위기에 애태웠으나, 그들 가운데 거대 환경단체 사람은 없었다. 그들이 내성천에 출몰한 건 영주댐이 거의 꼴을 갖춘 다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민간 쪽 대표를 자처하며 댐을 홍수 조절용으로 바꾸는 게 대안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스님과 지인들이 댐 철거 소송을 진행하고 있을 때였다.

댐은 들어설 이유가 없었고, 댐이 들어설 자리도 아니었다. 물을 가둔들 용처가 불분명했고, 지질학적 위험요소들도 속속 드러났다. 애초 모래강과, 그곳에 깃들여 사는 사람과 뭇 생명들보다 값어치 높은 건 없었다는 걸 내성천을 오래 지켜본 이들은 몸으로 안다. 그걸 모르는 건 정부, 수자원공사, 건설자본 같이 크고 우뚝한 존재들뿐이다. 거기에 거대 환경단체가 보태졌다. 그들은 또 하나의 토목 구조물처럼 보였다. 그 단체 페이스북 계정에 내성천 이야기가 오르면 열심히 ‘좋아요’를 눌렀다는 일행은 뒤늦게 자신을 탓했다. 그의 잘못은 그들의 잘못보다 클 수 없을 것이다.

늦가을 내성천에 파괴와 죽음의 소식만 들려오는 건 아니다. 국제멸종위기종인 먹황새 한 마리가 몇 해 전부터 꼬박꼬박 찾아와 겨울을 나고 간다. 한반도 남쪽에서 한 계절을 온전히 나는 먹황새는 그 한 개체뿐이라고 한다. 전기 불빛 하나 없이 까만 어둠에 둘러싸인 늦은 밤, 다리마저 끊겨 고립된 동호 강변 텐트 속에서 스님이 나직이 말했다. “나는 이렇게 가끔 찾아오는 이라도 있지만, 먹황새는 짝도 동무도 없이 오로지 혼자예요. 절대고독을 아는 저 새가 내 도반 같아요. 올해도 함께 겨울을 나야겠지요.” 그 말에, 나는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지 지레 묻지 않기로 했다.


2011년 봄 경북 영주시 평은면 동호마을 내성천 모습.

* 한국방송대신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