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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국정교과서 문제로 본 손석희 현상

손석희는 손석희인가 5


손석희는 ‘현상’이다. 오늘도 검색창에 그 이름 세 글자를 입력하면 그의 프로그램에 누가 나와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미주알고주알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어뷰징 기사들이 말 그대로 “차고 넘친다”. 그래서 컴퓨터 화면을 스크롤해야만 한다. 어뷰징의 본디 뜻을 그대로 빌리면, 손석희는 “오남용”되고 있다. 사전 풀이에 기댈 필요도 없이, 내 생각도 같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가 오남용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얼마 전 소설가 김훈이 손석희의 프로그램에 나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주어와 동사만으로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중략) 손석희 앵커가 뉴스를 다루거나 진행하는 것을 보고, 아 저것은 내가 지향하는 문체와 상당히 유사하다고 생각했어요.” 김훈은 명쾌하게 말했지만, 나는 그의 말에서 ‘손석희 현상’의 난해함을 읽었다.

김훈이 볼 때 손석희는 언론인의 본보기인데, 그 핵심은 ‘표현의 삼엄함’에 있다. 손석희는 절제된 언어로 칼날을 벼려 부조리한 현실에 들이댄다. 그런 손석희가 정작 어뷰징 되고 있는 것이다. 가령, 송건호나 리영희는 평생 언론인의 삼엄함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었지만, 살아서나 죽어서나 셀럽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손석희는 그 삼엄함으로 셀럽이 되었다.

앞에서 몇 차례 분석했던 ‘개입할 뿐 끼어들지 않는’ 손석희의 포지션은 손석희 현상의 한 가지 원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손석희 자신이 이 현상의 연금술사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손석희적인 것’을 다급하게 찾고 있었다. 손석희적인 것은 김훈 식으로 말하면 ‘삼엄한 언어’인데, 그것은 주어와 동사로만 구성된 형식이기에 앞서 현실의 대칭적 거울상이라고 봐야 한다. 우리 현실은 언어가 오남용되고, 불능에 빠진 상태다.

정부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이는 과정은 언어가 처한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우리 아이들이 주체사상을 배우고 있습니다.” 뉴라이트 대안교과서가 주체사상을 훨씬 자세히 다루었다는 사실이 반론의 힘을 갖지 못하는 건 저 언설이 이미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가 아닌 것들이 언어로 위장해서, 언어를 재단하고 심판하고 제거한다. 소통으로서 언어는 정지하고, 일방적인 심문과 주입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하지만 한국사 교과서가 몇 해 전까지도 국정이었다는 것과 작금의 국정화 사태를 예외나 비상으로 인식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식으로든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그때는 문제가 아니었고 지금은 문제란 말인가. 우리 사회가 그만큼 성숙해졌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정반대로도 생각해본다. 예전에는 교과서가 국정이어도 온갖 방법으로 대항담론이 존재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취약하지 않은가 하고.

한국사 교과서 문제는 국정이냐 검정이냐를 넘어서 다양성과 차이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인식태도에 대해 깊이 따져 묻고 생각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현행 검정교과서는 과연 다양성과 차이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가? “그렇다”고 답하는 이가 국정교과서에 반대하는 이들 가운데 다수라면 나는 국정화가 철회되어도 그다지 기쁠 것 같지 않다. 어차피 입시 엘리트 줄 세우기용이라는 건 검정이더라도 매한가지일 테니 말이다.

또한 같은 물음은 손석희 현상으로 고스란히 돌려져야 한다. 손석희는 국정 대 검정의 저널리즘 버전을 상징한다. 손석희는 기울어진 저널리즘 운동장이 그나마 덜 기울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하지만, 그 자신이 다양성과 차이를 제약하는 역할도 하고 있지 않는가. 그를 오남용하는 이들에게는 이런 말을 들려주고 싶다. ‘대리쾌락’은 언어 불능 사태에서 철저히 무용하다.

송건호, 리영희가 어렵게 기자생활을 할 당시, 사람들은 그들이 쓴 글의 행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읽으려고 했다. 지금은 무엇을 할 것인가.

* 한국방송대신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