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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손석희는 손석희인가 1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더는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한다. 지난달 <미디어오늘>이 정확히 언론학자 100명에게 저 질문을 던졌더니 손석희를 꼽은 이가 76명이었다고 한다. 그 다음은 방상훈 조선일보사 사장이었는데, 그가 그 영광의 자리에 오르는 데 필요한 건 단 1표였다. 합이 100이 되려면 1표씩 얻은 사람이 더 있을 법한데, 신문에는 따로 언급이 없었다. 2015년 한국의 언론인은 ‘손석희와 나머지 한줌’으로 이뤄져 있다고 봐도 되는 걸까.

내가 그의 영향력을 실감한 건 JTBC가 느닷없이 ‘종편 사둥이’에서 벗어나 시청자들의 환호를 받을 때였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JTBC 기자들의 표정에서 한국 저널리즘의 최후 보루가 된 것 같은 비장함이 내비쳤을 때보다는 정도가 덜했다. 손석희는 그저 종편 메인뉴스 앵커가 아니었다. 시청자들의 매체에 대한 인식뿐 아니라 기자들의 자의식까지 일거에 뒤바꿔놓을 수 있는 존재임을 입증했다. 그에 대해 늘 유보적이었던 나도 그의 영향력만큼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모든 언론인의 존재감을 삼켜버리는 이 막대한 영향력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걸까. 우리는 이 질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그가 정치인도 아니고 연예인도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해야 한다. 설령 언변이 유려하고 용모가 탁월하더라도 그는 어디까지나 언론인이다. 의외로 그의 자원은 언뜻 무색무취해 보이는 ‘중립성’에 기반하고 있다. ‘미디어’의 본디 뜻이 중간 전달자다. 주로 영미계 언론이 이 뜻을 각별히 중시하고, 그쪽의 형식(만)을 따온 한국 언론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손석희가 MBC <시선집중>을 떠나고 JTBC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는 장문의 이메일을 보냈다. 답장은 짧고 단호했다. “저는 인터뷰이 노릇은 하지 않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인터뷰 섭외의 기본은 삼고초려인데, 나는 곧장 뜻을 접었다. 자신은 인터뷰하는 사람이지 인터뷰 당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그의 말은 영미 저널리즘의 정곡에 닿아 있었고, 나는 그의 태도를 두고 입씨름을 벌일지언정 그 태도를 바꾸기 위해 공을 들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중립 자체는 힘(영향력)이 아니다. 그러나 마술을 부린다. 중립은 싸움에 끼어드는 대신 싸움을 중재하고 합의에 이르도록 이끌고 종용한다. 싸움에 끌려가거나 말려들지 않으려면 그만큼 단호해야 한다. <100분 토론>의 손석희는 말을 이끌어내는 사람이면서 가차 없이 끊는 사람이기도 했다. 시청자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도 그 대목이다. 이건 중립인가, 적극적인 개입인가. 개입할 뿐 끼어들지는 않음으로써 중립은 ‘예외성’이라는 다른 면모를 띠게 되는데, 그게 바로 ‘힘’이다.

왜 손석희는 인터뷰를 당하지 않고 하려고만 할까. 중립이면서 동시에 예외인 포지션을 유지해야 하는 사정과 깊이 닿아 있다. 중립이면서 동시에 예외인 위치는 2차원의 평면 위에 좌표로 존재하지 않는다. 역으로, 평면 위에 좌표를 찍으면 중립이면서 동시에 예외일 수 있는 입각점을 잃게 된다. 인터뷰를 당하는 건 그 좌표를 찍는 것이다. 그의 입각점은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다. 그렇다고 안이거나 밖인 것도 아니다. 다들 편 갈라 싸우는 국면에서 자칫 고립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걱정할 일은 아니다. 이미 우리 사회 전체가 그를 어떤 존재로 ‘간택’ 혹은 ‘추대’하고자 하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욕망의 조건을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존재는 영웅도 아니고, 우상도 아니다. 셀러브리티(셀럽)이다. 그런데 중립이면서 동시에 예외이고,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위치가 현실에 존재할 수 있는가. 실재계에서 찾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아니, 우리가 아는 손석희가 실재하기는 하는가. 이제 그런 이야기를 해볼 차례다.

※ <한국방송대신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