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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국대 도지사’ 홍준표의 국익론 앞에서

처음엔 차두리가 아예 축구선수를 그만두는 줄 알았다. 글을 쓰려고 검색해보니 국가대표만 은퇴한 거란다. ‘국가대표 은퇴’가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만, 따져보면 언어도단이다. 은퇴란 자신이 원할 때까지 머물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 행하는 자발적 이탈이다. 슈틸리케 국가대표 감독은 혹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을까. “이봐, 두리. 덕분에 한국 속담 하나 배웠어.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물부터 마신다’. 당케!”


물론 그는 여전히 탁월한 선수다. 그의 아버지 차범근은 TV 광고에 나와 아들의 스태미나에 경탄하며 “은퇴하기에 아깝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 모습을 보니 옛 생각이 났다. 1978년, 차범근은 한국 선수 가운데 최초로 국외 리그, 그것도 당대 최고 리그라던 서독(현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했다. 나의 영웅이 태극마크를 떼고 다른 국가에서 뛰게 되는 사태를 맞닥뜨리자, 나는 처음 본 유형의 시험 문제를 받아든 것처럼 난감했다.

여론도 팽팽하게 맞섰다. 차범근을 남기는 것과 내보내는 것 가운데 무엇이 국익인가. 박정희 대통령은 못 나가게 막으려 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국익을 앞세웠을 것이다. 차범근은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승인받기 위해 국민에게 읍소해야 했다.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보내달라. 선진 축구를 배우고 돌아와 더 크게 봉사하겠다.” 여론의 균형추가 급격히 기울었다. 서슬 퍼런 긴급조치 시대, 독재자마저 돌려세운 명분 역시 국익이었다.

40년의 시차를 두고 아버지와 아들은 데칼코마니처럼 대비된다. 태극마크를 내려놓으면서, 아버지는 국익의 명분에 비장하게 자신을 의탁한 반면 아들은 공놀이하듯 즐겼다. 그래서 아들은 국민들로부터 욕을 얻어먹고 있기라도 한가. 국가대표 은퇴는 ‘유희의 언어도단’이다. 여론은 40년 전 아버지에게 보냈던 호의만큼이나 아들에게도 호의를 보낸다. 오히려 오늘날 많은 이들은 아버지 시대의 비장미 넘치는 정서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아가 국민들은 더는 국가대표와 국익을 등치시키지 않는다. 한국 국가대표 ‘안현수’에서 러시아 국가대표 ‘빅토르 안’으로 변신한 쇼트트랙 선수에게도 기꺼이 박수를 보낸다. 이를 두고 한국인이 국가를 초월해 세계시민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하면 물론 터무니없는 억측이다. 그보다는 여론의 비난이 국적을 바꾼 선수가 아니라 그를 퇴출시킨 빙상협회로 향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국민들은 ‘국익’의 본성을 간파하기 시작했다.

지난 정부의 자원외교가 국익을 참칭해 사사로이 뒷돈을 챙긴 사기극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천안함 참사 이후 해군력 강화의 기치를 내건 군 장성들의 진짜 관심사는 국가안보가 아니라 퇴역 후의 방산사업이었다. 사적 이익 도모 여부를 떠나, 국익을 맹동적으로 주창하는 행태는 정권을 가리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노무현 정부 때의 국외 파병은 국익을 앞세웠지만, 그 뒤 국가 단위의 이익을 산출하려는 어떤 시도도 없었다.

시도했다고 결과가 달라질 리 없다. 국익은 본디 산출되지 않는 법이다. 비교할 수 없는 것을 비교대상으로 삼는 우격다짐의 가치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다 국익’이라는 화용론은 필연이다. 무엇이 국익인가, 얼마나 국익인가라는 질문은 애초 제출될 수 없다. 그리고 저 ‘○○’의 빈칸은 언제나 보통명사로 번역되어도 무방하다. 국익론은 반드시 개인을 희생시킨다. 국익론에 희생되는 개인은 예외 없이 사회적 약자다.


가령, 졸지에 무상급식 중단 사태를 맞은 경남지역 학생들이 그렇다. 국가대표급 광역단체장인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국익을 위한 정책적 결단”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지금 경남의 학부모들은 학교 안에 솥단지를 내걸고 직접 밥을 짓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그의 국익론에서 탈주하고 있다. 홍 지사는 서둘러 차범근 부자에게 자문을 구하는 게 좋을 성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