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발표글

내러티브는 태도다

내러티브에 대한 열기가 뜨거운 건 사실이다. 관련 강좌나 출판물이 쉽게 눈에 띄고, 일간지 지면에도 장문의 기사들이 흔해졌다. 심지어 문패 제목에 대놓고 ‘내러티브’를 내세우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이는 내러티브 ‘쓰기’에 대한 관심이다. 수용자들은 자신이 읽는 기사가 스트레이트인지 내러티브인지 관심 없다. 스트레이트 방식에 오래 길들여져 있고, 그 방식이 더는 수용자에게 소구하지 못한다는 위기의식을 공유한 미디어와 미디어 종사자들이 다급하게 내러티브에서 구원 가능성을 찾고자 한다. 그런데 그조차 반(反) 내러티브적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러티브를 소개한 책들을 보면 대개 내러티브란 무엇인지 독자적으로 정의부터 하고 들어간다. 하지만 내러티브는 홀로 개념화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스트레이트와 견줄 때라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역피라미드) 스트레이트의 속성은 정언적이고 연역적이라는 데 있다. ‘야마’ ‘리드’ 같이, 스트레이트와 관련해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들은 스트레이트의 이런 속성을 방증한다. 정의의 속성도 똑같다. 내러티브를 정의부터 내리고 들어가는 것은 지극히 역피라미드적인 셈이다. 스파르타식으로 창의력 교육을 하겠다는 것만큼이나 형용모순이다. 내러티브에 정의 따위는 없다.

내러티브는 말 그대로 ‘이야기’다. 스트레이트는 이야기가 아니라 ‘구조’다. 엄마가 잠자리에서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나 아낙들의 빨래터 수다를 떠올려보자. 둘다 도입이 정언적이지 않다. 스트레이트 기사 같으면 마땅히 정연한 6하원칙에 맞춰 곧바로 리드에 나와야 할 ‘사실’(fact)이 돌고 돌아 한참 뒤에야 나온다. 그것도 다분히 우연한 모습으로 띄엄띄엄. 이런 전개는 선형적이되 직선은 아니다. 서사와 묘사가 뫼비우스 띠의 안과 밖을 오가며 변주된다. 우리는 스트레이트를 익히느라 타고난 이야기 감각을 퇴화시켜온 게 아닐까. 내러티브란 그 감각을 되살리는 일이다.

사실, 스트레이트는 기사 작법이기 전에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세계관이다. 스트레이트에 길들여진 기자는 기사 가치를 비인격적이고 가해자 공격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강하다. 사람보다는 사건이, 개인보다는 사회가, 미시보다는 거시가 중시된다. 이에 필요한 건 힘과 크기다. “야마가 뭐야?”라는 물음 안에는 이런 태도가 응축돼있다. 내러티브는 무엇보다 사람 자체를 주목할 때라야 접근할 수 있다. 또한 사실의 흐름과 맥락에 가장 부합하는 구성과 전개를 바란다면 ‘느낌’을 중시해야 한다. 그것은 사람과 사물, 현상과 사태를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가 달라져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하나만 들어보자. 나는 <한겨레21> 2001년 10월 11일치 표지이야기 ‘장모시대’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다. ‘박불출(40)씨의 이름은, 눈치챘겠지만, 가명이다.’ 다섯째 단락에 나오는 문장은 이렇다. ‘‘가족지도’가 바뀌고 있다.’ 역피라미드 스트레이트식으로 접근했다면 첫 문장은 실제 기사의 다섯째 단락 문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취재 과정에서 만난 수많은 남성들이 사진 촬영은커녕 이름 밝히기조차 꺼리는 것을 봤다. 난 그 느낌을 중시해 첫 문장을 만들었고, 그것이야 말로 가족을 둘러싼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라고 판단했다. 육아와 관련한 제법 규모있는 설문 조사도 실시했지만, 간단한 보조기사로 처리했다. 통상적으로 접근했다면 메인기사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수치가 사람을 앞설 수 없다고 봤다.

이 기사는 여러 사람들을 인터뷰해서, 육아의 대리인이 된 오늘날 장모의 위상과 관계방식 등을 여러 측면에서 드러내 보여줬다. 이런 취지를 살리려면 글을 맥락적으로 전개해야 한다. 맥락적 전개란 무엇일까. 그 사회 구성원들의 공통의 경험치, 집단적 기억을 타고 가는 전개다. 여기에는 논리적 인과도, 전문가의 설명도 군더더기가 되기 십상이다. 다만 그들의 소소한 생활과 감정이 이야기로 재구성돼 하나의 맥락을 형성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내러티브, 즉 이야기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결별하려는 의지가 그 출발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광주전남기자협회보>에 게재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