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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소년은 그들과 이어진 벼리이다

<살아남은 아이>(한종선, 전규찬, 박래군·문주·2013 증보판)에 쓴 서문입니다.

 

코흘리개 적 우리는 길에서 색안경을 끼고 카세트 테이프 반주에 맞춰 개신교 복음성가 메들리를 부르는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때가 잔뜩 낀 플라스틱 바구니에 공책 살 돈까지 살뜰히 털어넣고야 만 경험을 한두 번은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른생활’ 교과서에 나오는 규범에 조금씩 의심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다시 말해 ‘나라님도 구제 못하는 가난을 어찌 일개 바른 생활 어린이의 오지랖이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판단이 서면서부터, 우리는 공책 살 돈의 효용을 공책에만 국한시키게 됐다. 그러고 나면 시각 장애인 가수들은 거리 풍경의 보잘 것 없는 소품이 되어 소실점 너머로 사라졌고, 그들의 노래 소리도 귓전에서 차츰 소거되었다. 우리는 다들 그런 인식과 행동의 궤도를 따라가며 성장했다. 우리의 성장은 그들이 비가시화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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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모티브는 우리가 그런 경험을 하던 나이보다 더 어린 나이에 영문도 모른 채 ‘수용소’ 생활을 시작한 어느 소년의 생존을 위한 사투기이다. 수용소의 이름(형제 복지원)은 ‘가족’ ‘연대’ 따위의 몽실몽실한 연상 작용을 일으키지만, 내부의 현실은 그 이름에 대한 자기부정 혹은 조롱처럼 들린다. 환등기 그림처럼 쉴 새 없이 넘어가는 일화들은 인간이 타자에게 어디까지 잔혹할 수 있는지를 증언하는 듯하다. 그 중에서도 폭력 행사의 가시적 주체는 조장, 소대장, 중대장 등의 군대식 직책으로 불리는 이들이다. 나는 원고를 읽는 내내 그들은 어디에서 왔고, 어떤 위상의 존재였는지 궁금했다.

어느덧 30대 후반의 어른이 된 소년한테서 얼마 전 직접 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소년과 똑같은 신분, 즉 수용자였다. 같은 수용자에게 어쩌면 그토록 잔인하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을까. 아우슈비츠 생환 작가인 프리모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모든 문명적 상부구조가 제거되면 인간의 행동은 기본적으로 잔인하고 이기적으로 우둔하다”고 했다. 그들은 폭력의 화신과도 같았지만, 적어도 처음부터 악인의 유전자를 타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폭력은 구조를 통해 사주됐지만, 원장을 비롯해 폭력을 사주한 일속의 권력 구조는 소년의 눈에 포착되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의미에서 비가시적인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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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를 읽어가면서, 어쩌면 이 책은 소년의 수용소 생활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후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왜 수용소를 나온 뒤로도 피해 당사자들의 삶은 질곡을 벗어나지 못하였는가? 25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소년이 우리 사회에 던진 질문도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사이 한국 사회는 나름대로 민주화되었고, 국가가 나서서 인권기구를 설립하고 과거사 진상 규명 작업도 활발히 펼쳤지만, 소년과 그들의 이야기는 철저히 잊혀졌다. 김밥 할머니들뿐 아니라 연예인 기부 천사들까지 속속 날개옷을 입을 때에도 그들의 사연은 한 번도 가시화되지 못했다. 우리는 도대체 뭘 한 거지?

수용소의 참상이 폭로된 건 1987년이었다. 그러니까 대학생 박종철이 고문을 받다 비명에 가고, 6·10 민주화운동과 7~8월 노동자 대투쟁, 그리고 개헌과 16년만의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그해. 그때까지 세상 사람들에게 수용소는 자신의 시공간과 완전히 분리된 외부의 시공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헬 게이트(지옥문)가 열렸다.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의 눈에 포착된 외부 세계에 경악했고, 그래야 마땅하다는 듯 분노했다. 그러나 그곳이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는 사실에는 무관심했다. 세상에는 훨씬 다급하고 중요한 일이 많았다. 대학생이 끌려가 죽어 나왔고,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해 민주화를 실현해야 했다.

소년과 동료 전원은 서둘러 세상 이 편으로 ‘삼투압’됐다. 수용소에 들어갈 때도 그랬듯이, 나올 때도 자기결정권은 없었다. 수용소 밖은 수용소보다 훨씬 너른 수용소였다. 누구도 정상성의 범주 안으로 스며들지 못했다. 수용소 안의 인권 유린을 규탄했던 여론은 위생학으로 급선회했다. 그들은 서둘러 역 앞에서 보이지 않게 해야 할 무리가 되었다. 소년은 같은 수용소에 있으면서도 접촉할 수 없었던 누나와 아버지가 어디로 흘러갔는지 소식조차 들을 수 없었다. 또 다른 디아스포라였다. 끝없이 게토를 떠돌았고, 뒤늦게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고도 아직까지 영구임대주택과 정신병원으로 뿔뿔이 흩어져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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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가 이 책을 읽는 것은 소년이 25년 만에 우리 사회에 던진 질문에 답을 찾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소년은 왜 한 번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았을까. 수용소와 연관된 모든 이들이 퇴소 이후에도 여전히 비가시적인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문맥과 행간에서 찾아봐야 한다. 이제 이 문제는 새로운 아포리아(곤경)이어야 한다.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적 성취가 가장 가시적이었던 시기에 소년은 오히려 비가시적인 존재로, 사회적 투명인간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서 도출할 수 있는 문제의식은 무엇일까. 이 책은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어느 거대한 공백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꽤나 엄격히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적잖이 자의적이고 배제적이다. 헬 게이트가 잠시 열리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처음부터 늘 거기 있었던 세계를 인식조차 못하는 것도 그 세계가 공적 범주 안으로 들어오기에 ‘부족’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부랑인으로 낙인찍힌 헐벗은 존재들은 안쓰럽지만, 그들의 불행은 길을 걷다 우연히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한 이들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들을 괴롭히는 악한들에게는 치를 떨지만, 우리 사회의 공적 의무는 악행에 상응하는 죗값을 치르게 하는 데까지다. 나머지는 사적 영역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미학이다. 소년은, 그리고 그들은 한국의 진보세력에게 미학적인 쾌락을 제공하기에 ‘부족’했던 것이다. 헐벗고 남루하고 억울할지언정, 그들에게는 ‘열사’의 미학이 없다. 어느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누구의 연탄 한 장 되어 본 적 없는 그들이다(안도현, ‘연탄 한 장’). 사건의 성격은 보수세력에게 오히려 맞춤하다고 여겨진다. 실제로 보수적인 기부천사들은 전국 대도시 역 앞에서 날마다 밥을 푼다. 하지만 헐벗은 이들에 대한 유린은 밥 앞에서도 끝없이 반복된다. 그들에게 해코지 한 번 안 해본 사람들이 압도적 다수이면서도 그들을 투명인간으로 삭제해버리는 한없이 잔인한 공모 사회는 이렇게 형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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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근래 내가 읽은 책 가운데 저자 구성에서 가장 급진적인 형식을 띠고 있다. 글쓰기를 해본 적이 없는 초등학교 검정고시 학력의 한종선과 문화 연구자이자 대학교수인 전규찬, 오랜 시간 현장을 누벼온 한국의 대표적 인권 운동가 박래군이 집필을 나눠 맡았다. 삶의 공간에서도 좀체 한자리에 모이기 힘든 이들이 책을 통해서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이 책의 탁월한 성취로 보인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누구와 어떻게 만나서 보이는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실증적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세 사람에게 공통으로 발견되는 부재는 다름 아닌 기존의 진보적 미학이다. 덕분에 이 책은 출현할 수 있었다.

한 번도 발언권을 가져보지 못한 피해 당사자가 직접 입을 열어 발언하고, 그가 발언할 수 있도록 진보적 지식인과 활동가가 곁에서 함께 발언함으로써 이 문제는 ‘국가 폭력’이라는 공적·정치적 의제로 비로소 ‘복권’된다. 이것은 왜 진보적인 의제가 아니란 말인가. 우리 사회가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정신승리법이나 다름없는 ‘힐링’이 판치는 지금, 이 책은 진보를 재구성하고 확장하는 데 중요한 인식론적 단초를 제시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소년은 실업에 신음하고 있는 청년, 저 높은 철탑 위에서 목숨 걸고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노동자 등 모든 배제된 자들을 이어주고 엮어주는 벼리이다.

고백컨대, 이 책은 한때 공책 살 돈까지 거리 시각장애인 가수의 바구니에 털어넣었으나 그 뒤로 머리만 커져버린 40대 소년에게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레오가 삼킨 빨간 알약과도 같았다. 스무 살 무렵 선배의 도움으로 보이지 않던 세계가 순식간에 눈에 들어왔듯이, 많은 이들이 이 책을 통해, 고통스럽지만, 다시 한 번 매트릭스 너머를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