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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만 글 - <뿌리깊은 나무>로 본 올해의 책

※ <한겨레21> 연말 별책 기획인 ‘올해의 책’ 서문입니다. 저에게 던져진 글감은 ‘책이란 무엇인가’였습니다. 귀가 없는 도가니를 들어올리라는 것과 같았죠. 겨우 썼고, 뒷부분은 편집자에게 기획 취지에 맞게 덧붙이라고 비워두었습니다.


<뿌리깊은 나무>는 한글 창제 과정을 매우 사실감 넘치게 그려낸 드라마였습니다. 극적 흥미를 끌어올린 요소들이 상당부분 허구라 해서 드라마의 가치가 낮아질 수는 없습니다. ‘사실적인 허구’라는 형용모순은 오히려 (역사) 드라마라는 장르에는 정체성과 같은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일대기를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다”고 회고하는 것도 이 장르가 가진 허구성의 탁월한 사실감에 기댄 진술일 테지요. 그리고 그 사실감이 탁월할수록 현실세계보다 더욱 명징한 정치적·사회적 메시지가 구성된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충분히 검증된 바입니다.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문자의 정치성, 다시 말해 읽고 쓰는 것의 계급성에 관한 문제가 그런 메시지에 해당할 것입니다. 또한 그 메시지는 읽고 쓰는 일을 매개하는 문자의 저장고, 즉 책에 관한 정치적 암시도 담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임금 이도가 새 글자로 펴내려 한 첫 번째 책이 유교 경전이 아닌 불경(佛經)이었다는 플롯이 그런 경우입니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모티프가 하필 문자와 책이라는 사실은 드라마 바깥의 현실세계와 만나 제3의 아이러니한 재미를 줍니다. 그 이전에 이 드라마가 소설(책)을 원작으로 쓰였다는 것부터가 하나의 메타포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소설 <뿌리깊은 나무>도 사실적인 허구를 바탕으로 웬만큼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책입니다. 그러나 드라마의 성공에는 미치지 못한 것도, 또 드라마의 성공으로 다시금 조명을 받은 것도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드라마가 소설에 빚을 진 것일까요, 아니면 소설이 오히려 드라마에 빚진 것일까요? 질문은 여기에서 멈춰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드라마는 읽고 쓰는 일, 나아가 그것을 매개하는 책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을까요? 그리하여 드라마와 소설(책)은 서로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요? 아니, 일방적인 삼투는 아닐까요? 좀 더 직설적으로 묻습니다. 우리는 드라마에 눈과 귀를 빼앗겨 책읽기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지는 않은가요?

출판계의 어려움이 더는 뉴스가 될 수 없는 시대입니다. 위기의 원인은 대개 외부 환경에서 탐문되곤 합니다. 해법이 내부에서 제시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다른 책도 아니고, 책을 이야기하는 이 책에서 드라마 이야기가 마중물이 되는 것부터 하나의 징후로 읽어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연말이면 올해의 드라마와 올해의 영화, 올해의 노래 등이 화려한 파티 분위기 속에 선정되고, 그 상황은 황금시간대 생방송으로 전국에 중계됩니다. 올해의 책 선정은 견주기 민망할 만큼 소박합니다. 더구나 그 헐거운 이벤트의 순위조차 출판계 내부의 독자적 작용의 결과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출판계의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미다스의 손은 단연 TV의 책 소개 프로그램입니다. 극중에서 새 글 창제의 역사적 파장과 관련해 ‘당대의 백성들만 생각하겠다’고 했던 임금 이도가 지금 살아 돌아와 <뿌리깊은 나무>라는 현실의 서사를 목도한다면 어떻게 여길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백성이면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라도 읽고 쓰는 사태를 극중 정기준은 물론 이도조차 ‘역병’에 비유했습니다. 역병은 오늘날 민주주의입니다. 정기준의 이념적 태도는 시공을 횡단해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과 일치합니다. 민주주의는 곧 중우정치인 셈이지요. 그렇다고 정기준과 대척점에 있는 이도가 서구 근대 사회계약론자들의 그것과 같은 태도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회계약론자들과 달리 이도는 문해 능력을 갖춘 인민을 이성적 주체로 보았다기보다 욕망의 주체로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역병’인 것이고, 그렇게 돌아가는 체제의 작동원리는 요즘 표현으로 ‘욕망의 정치’ 쯤에 해당할 것입니다. 각자의 욕망이 주어인 세상에서 문자와 책은 주어는커녕 목적어도 될 수 없습니다. 매개일 뿐입니다. 이도는 각자의 욕망이 그 매개를 통해 어떻게 작동할지 예측하지 않음으로써 새 글자를 반포할 수 있었고, 지금의 사태 또한 애초 예측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출판계의 위기를 곧바로 민주주의의 위기와 등치하는 건 자의적 비약일 따름입니다. 이도의 논리가 아닌 정기준의 논리에 가깝습니다. 정기준이 오늘의 사태를 본다면 책(시장)을 반드시 지켜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책을 위협하는 모든 것들과 싸워 물리쳐야 한다고 했을 것입니다. 반면, 이도라면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드라마와 책 프로그램과 디지털 기기와 소셜 미디어를 보급하는 것은 책을 폐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책을 살리는 일이다”라고. 실제 극중 이도는 새 글자가 한자를 폐하지 않고, 반대로 한자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크게 늘릴 것이라고 내다봅니다. 우리는 인터넷 서점에서 좀 더 편하게 책을 사기도 하고, 태블릿 피시로 책을 읽기도 합니다. 전자책의 기능에 최적화한 ‘아마존 킨들’은 태블릿 피시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책의 위기’라는 식의 귀가 없는 언어가 과연 실태를 온전히 반영하고 있기는 한 걸까요?

쓰기와 관련해 이도의 새 글자가 일반 백성들에게 이름 석 자 정도를 감당하는 것이었다면, 오늘날엔 누구라도 자신의 생각을 글로 펼칠 수 있습니다. 기술하는 매개로서 한글의 목표가 달성된 것은 책(문자)의 위기가 운위되고 있는, 창제 500년이 지난 뒤인 바로 지금입니다. 현재의 위기는 출판 산업의 위기입니다. 읽고 쓰는 일을 매개하는 문자의 저장고로서의 독점적 위상이 무너진 지는 이미 오래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중요하게 제기되어야 할 것은 ‘어떤 책이어야 하는가’ ‘다른 전달수단과 어떻게 관계하고 차별화할 것인가’ 하는 정치학적·위상학적 물음일 것입니다. 지식을 체계화하고 집적하고 심화하고 확장할 수 있는 전달수단으로서의 책은 사실 책의 새로운 위상이 아니라 본래 위상이었습니다. 책의 위상이 복원될 때, 책을 읽는 것과 읽지 않는 것의 차이는 더욱 커지고,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역병과 백신은 뿌리가 하나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주저리 주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