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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도청’이라는 취재방법론

사칭하고, 으르고, 협박하고, 거래하고, 심지어 훔치는 일은, 고백하건대 언론판의 무용담거리다, 라고 나는 2005년 12월에 썼다. 이른바 황우석 사태 때다. 문화방송 <PD수첩>이 취재원을 을러서 원하는 답을 얻어냈다는 주장이 제기돼 급기야 프로그램이 중단된 직후였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는, 적어도 저널리즘에 있어서는 논쟁적이다. 공권력이 아닌 언론이 꼭꼭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려면 다양한 수단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다만, 공익을 위하는 목적이 확고하고 인권을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은 논쟁적일 수 없다.

당시 언론들은 도덕군자 행세를 했다. <PD수첩>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던 그들이었다. <PD수첩>을 사정없이 질타하던 그 순간에도, 그들 자신은 사칭하고 으르고 협박하고 거래하고 훔치는 행위를 중단했을까 싶었다. 평소 가까이서 지켜본 경험에서 나온 합리적 의심이었다. 실제 그들이 때린 건 <PD수첩>이었지, 취재 윤리가 아니었다. 한동안 잠적했던 황우석씨가 때맞춰 떠들썩하게 병원에 입원했고, 그들은 황씨의 병상 사진을 대문짝만 하게 보도했다. 그렇게 ‘황우석=희생자’라는 미장센이 완성됐다.

최근 루퍼트 머독이 소유한 영국 주간지 <뉴스 오브 더 월드>가 불법 도청을 일삼아왔던 사실이 드러나면서 큰 파문이 일었다. 2005년부터 연인원 4천여 명을 도청 또는 해킹했다고 하니, 비밀경찰이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도청 대상이 된 이들의 면면을 보면, 이 매체의 도청 의도가 공익과는 전혀 무관할 뿐 아니라, 오로지 선정성을 겨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68년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 최대의 주간지이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언론왕’ 머독의 매체라 해도 폐간의 운명을 비켜갈 수는 없었다.

한국에서는 KBS가 민주당의 국회 내 회의를 도청했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경찰이 도청 혐의를 받는 기자의 핸드폰과 노트북을 압수수색했으나, 공교롭게도 그 기자는 최근 핸드폰과 노트북을 동시에 바꿨다고 한다. KBS는 도청 사실을 부인할 뿐, 회의 녹취록 입수 경위에는 침묵하고 있다. KBS 기자들은 이미 민주당 의원들에게 “내년 총선 때 보자”는 협박도 자행한 터였다. KBS가 취재하려고 했거나 협박한 내용은 공익성은커녕 선정성과도 무관한,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자사의 수신료 인상에 관한 것이었다. 전형적인 제척 사유다.

5년 여 전 <PD수첩>을 맹공격했던 언론들이 이번에는 신중하기 이를 데 없다. 한동안 무관심을 가장한 비보도를 유지해오더니, 최근 사태 전개가 심상치 않자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진정성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PD수첩>을 때리던 그 뻔뻔함의 일관성이라도 기대하는 건 과욕일까.

* 이 글은 <한국방송대학보> 제1636호(2011년 7월 18일자)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