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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정치적 인재(人災), 정치적 의인(義人)

여름엔 어김없이 태풍이 찾아오고, 그때마다 모든 방송사는 전국의 중계차를 총동원해 불안감을 극도화한다. 물론 재난에 대비한 경각심에 지나침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설령 별 탈 없이 태풍이 빠져나간다 해도 방송사들은 한동안 생중계를 이어가며 입맛을 다신다. 재해는 언론에게 둘도 없는 콘텐츠 소스인 것이다. 그다음은 재해 원인분석인데, 이 단계에서 온 국민이 다 아는 스테레오타입이 등장한다. “천재가 아니라 인재인 것으로 드러났다.”

자연재해는 천재와 인재가 겹쳐서 나타나기 마련이다.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줄일 수만 있다면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재해 예방에 있어서 자연의 순리를 어디까지 거스르고 맞서야 하는지는 한 번 더 생각해볼 문제다. 공학보다 생태학이 훌륭한 재해대책일 때도 있다. 서울 한강 한가운데 인공섬을 띄우면 아무리 대책을 잘 세운다고 해도 재해의 위험성이 높아진다. 여기서 탈이 난다면 액면 그대로 인재일 것이다.

조선일보 6월 27일치 10면

태풍 ‘메아리’로 왜관철교(호국의 다리)가 무너졌다. 그런데 대다수 언론은 무덤덤하기만 하다. “100년 이상 된 낡은 교각이 장맛비로 불어난 강물을 견디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한국방송) 6월 25일)는 식이다. 유력 신문들은 대부분 사진 한 컷으로 끝내고 말았다. 이 지역 강우량은 불과 100mm 안팎이었다. ‘매미’ 같은 사상초유의 태풍이 왔을 때도 어김없이 인재를 찾아내던 탐사정신은 어디로 갔을까? 더는 애먼 사람에게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한 것인가?

왜관철교 붕괴는 따로 파헤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인재다. 4대강 공사로 강바닥을 준설해 다릿발 주변이 부실해졌고 유속도 빨라져 다리가 무너진 것이다. 언론이 이런 번연한 사실에 침묵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번 사고가 ‘정치적 인재’이기 때문이다. 숱한 반대와 경고에도 코웃음을 치며 무모한 토목놀음을 벌여온 세력과 이들 언론은 정치적 동지이자 경제적 동업자다. 일개 지방 공무원 몇 명에게 책임을 묻는 수준을 넘어선다면 인재도 천재일 뿐이다.

시치미만 떼고 있기도 민망하던 차에 의인이 출현했다. 고등학생이 다리가 무너진 것을 보고 112에 신고를 한 뒤 경찰이 도착하기 전까지 통행을 막기 위해 자리를 지켰다고 한다. 방송들이 미담 기사를 훈훈하게 내보낼 때, 한 지역 신문은 당시가 한국전쟁 발발시각과 비슷했다며 난데없이 호국정신을 고취하고 나섰다(매일신문 6월 28일자). 미담의 주인공은 제방의 구멍을 몸으로 막다가 숨진 네덜란드 소년과 이승복 어린이를 합쳐놓은 인격으로 현전했다.

정치적 인재가 정치적 의인에 의해 덮였다. 그래서 올여름이 더 걱정이다.


※ <한국방송대학보> 제1634호(2011년 7월 4일치)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