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필 꽂힌 타인의 글

아무도 가지 않은 길… 꺾여버린 ‘알피니즘’

10년도 더 된 기사입니다.
제가 쓴 건 아니고, 후배에게 쓰게 했던 기사인데, <에스비에스> ‘그것이 알고 싶다’ 오은선 대장 편을 보고 나서 생각나, 어렵게 한국언론진흥재단 데이터베이스에서 찾아냈습니다.
URL을 걸어보려고 했는데 안 돼서, 여기에 퍼옮깁니다.

10년이 넘게 지나서도 한국의 등반 문화는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많은 양식 있는 산악인들은 오래 전부터 언론의 조명과 상관 없이 묵묵히 알피니즘을 추구하고 있지만요.

김연수의 단편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은 히말라야에 대한 1980년대 한국 군부독재의 국가주의를 몽환적인 분위기로 엿볼 수 있지요.  

[한겨레]|1998-10-16|13면 |기획,연재 |2417자
◎탈레이사가르봉 북벽 새 길 개척중 숨진 신상만 최승철 김형진씨/결과만 중요시하는 우리 산악문화 속에서 더욱 어렵고 새로운 등반 추구하는 진정한 ‘투혼’ 보여줘


추석이던 지난 5일, 등반사고가 방송 뉴스에 보도됐다. 인도 북부 히말라야산맥의 탈레이사가르봉(해발 6909m) 등반에 나섰던 한국인 등반대원 3명이 추락해 숨졌다는 내용이었다. 보도는 아주 짧았고, 심지어 그들의 이름도 제대로 확인되지 않아 단지 김, 최, 심씨라고만 소개됐다. 탈레이사가르봉은 보통사람들이 보기에 그리 높지도 유명하지도 않은 산이었고, 사람들은 ‘또 사고가 났구나’ 하고 심드렁하게 지나쳤다.

‘김씨, 최씨, 심씨’. 그들의 이름은 신상만(32), 최승철(28), 김형진(25)이었다. 한 산악인에 따르면 그들은 ‘죽어서는 안될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캐러밴(짐을 베이스캠프까지 나르는 것)을 시작한 것은 지난 8월30일, 베이스캠프, 전진캠프, 캠프1을 모두 만들고 본등반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9월26일이었다. 그들이 올라간 곳은 탈레이사가르봉의 북벽이다. 이른바 ‘악마의 붉은 성벽’이라고 불리는 탈레이사가르. 그 중에서도 북벽은 직각에 가까운 깎아지른 절벽이다. 그들의 목표는 바로 이 북벽에 ‘새로운 길’(신루트)을 만드는 것이었다.

29일 오후 4시께 이들은 드디어 정상에서 겨우 100여m 떨어진 설사면에 발을 내디뎠다. 갑자기 구름이 낀 것은 그때였다. “1시간 뒤 겨우 구름이 걷혔을 때 그들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베이스캠프에서 망원경으로 이들을 살피고 있던 손재식(42·산악인)씨의 증언이다. 로프로 서로 연결돼 있던 그들은 3명 모두 다음날 마지막으로 관측된 자리에서 1400m 아래인 캠프1 부근에서 발견됐다. 그리고 수십 군데가 골절된 그들의 주검은 7일 머나먼 이국, 인도의 한 작은 마을에서 화장됐다. 사고원인은 눈사태 등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이들의 선배였던 산악인 민병준씨는 “단지 지인이어서가 아니라 우리 산악계에서 ‘진정한’ 알피니즘(눈과 얼음이 있는 고산을 오르는 행위·정신)을 추구했던 대표적인 세 사람을 한꺼번에 잃었다는 사실 때문에 슬픔이 더 크다”고 안타까워했다. “한국산악계는 10년은 후퇴했다”고 민씨는 단언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인 언론은 없었다. 월간 〈사람과 산〉 편집인 남선우씨는 “이들이 탈레이사가르 북벽 등정에 성공했다 해도 사람들은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8000m가 넘는 산을 올라야 뭔가 해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빛도 나지’ 않고 위험하기만 한 탈레이사가르 북벽 등반을 시도한 것일까? 손재식씨는 “아직 세계에서 한 팀밖에 올라가지 못한 탈레이사가르 북벽에 신루트를 개척하는 것은 8000m가 넘는 산을 노멀루트(그 산을 오르는 가장 일반적인 길)로 가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가치 있다”며 “순수한 알피니즘을 추구하던 이들에게 그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순수한 알피니즘.’ 산악인들은 알피니즘의 핵심을 지금까지 시도되지 않았던 방법과 가지 않았던 루트에 도전하는 선구성이라고 못박는다. ‘더욱 어렵고 더욱 새로운’ 등반의 추구. 따라서 중요한 것은 올라간 산이 몇m인지, 정상을 올라갔는지 못올라갔는지 하는 피상적인 결과가 아니라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내용으로 올라갔는가 하는 것이다.

남씨는 “현재 우리 산악계와 사회는 과정은 보지 않고 단지 결과만으로 등반을 평가하는 경향이 만연해 있다”고 비판했다. 똑같은 에베레스트 등정이라도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이다. 얼마나 어려운 길로 갔는지, 셰르파(고산등반을 돕는 히말라야 고산족)는 몇 명이나 같이 갔는지, 산소 마스크를 사용했는지, 캠프는 몇개나 쳤는지, 무슨 계절에 갔는지 하는 과정과 방법은 무시되고 단지 에베레스트에 등정했다는 결과만 남는다. 남씨는 “이런 ‘등정주의’는 세계적으로 이미 인정을 못받는 추세인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등반문화를 지배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풍토 속에서 2002년까지 해마다 히말라야 고봉들에 새로운 길을 개척하겠다던 이들의 목표는 외로운 길이었다. 언론의 조명을 받으려면 차라리 노멀루트로 8천m 이상 봉우리를 여러 개 올라가는 목표를 세우는 게 나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들에게 등반은 남에게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산행도 하나의 수행이다.” 최씨가 인도의 4대 성지라는 탈레이사가르 기슭의 마을 강고트리에서 일생 동안 고행을 하며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자들을 보면서 부인 김점숙(32·산악인)씨에게 쓴 마지막 엽서의 한 구절이다.

신상만씨는 평소 “마지막까지도 왜 산에 오르는지 모를 것 같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산이 던져주는 어려움을 해결해가며 스스로 만족과 깨달음을 얻는 그 과정의 희열 때문에 산을 다시 찾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더욱, 중요한 것은 ‘과정의 정신’일지 모른다.

<안선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