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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시대

한겨레신문사에서 새로 창간하는 경제월간지 <이코노미 인사이트>에 실을 기사를 데스킹하다가, 독일 <슈피겔>에 실린 그리스 경제위기 관련 번역 기사를 두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무엇보다 기사 스타일이 탁월했고, 문제의 본질을 보여주기에 더없이 좋은 작법에 감탄했다. 그러다 오래전 내가 썼던 글이 떠올라 검색을 해보았다. 나도 한때 글을 잘 쓰던 시절이 있었다는 나르시시즘에 잠시 빠졌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됐을까? 짐작컨대, 내 글에서 ‘절제’가 증발했기 때문인 듯하다. 나는 어정쩡한 깊이에서 방언처럼 너스레를 늘어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급변하는 가족지도…왜 사위들은 처가살이를 선택하는가

박불출(40)씨의 이름은, 눈치챘겠지만, 가명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가명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기사는 무슨 대단한 비사를 폭로하려고 쓰여지는 게 아니다.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다. 그런데도 그들은 가명의 그늘에 머물고자 한다. 자,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이름하여 ‘장모시대’.

친부모가 사돈댁을 찾는 희한한 역귀성

박불출씨는 올 추석에도 처갓집에서 머물 것이다. 아니, 처갓집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11년째 처가살이를 해오고 있다. 5년 전부터는 명절이 되어도 친가를 찾지 않고 처가에서 눌러 지낸다. 그렇다고 친가와 연을 끊고 지내는 것은 아니다. 놀라지 마시라. 대신 지방에 사는 친부모가 명절 때면 직접 사돈댁을 찾아오신다. 아주 희한한 역귀성이다. 장남인 그는 친가에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안부전화를 한다. 이쯤 되면 ‘장가간다’(장인댁에 들어간다)는 말의 어원을 완벽하게 재현해낸 게 아닐까.

하지만 그가 사는 곳은 엄밀히 말해 장인댁이 아니다. 장모댁이다. 이미 오래 전 장인은 돌아가셨다. 결혼 뒤 박씨 부부가 함께 외국에 나가 있을 때 갑자기 벌어진 일이었다. 그 막막한 시기에 팔 걷고 나서 장례를 거들어준 게 바로 박씨 친가 부모였다. 박씨의 친가와 처가는 사돈끼리도 얼마나 가깝게 지낼 수 있는지를 두고 기록에 도전하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명절이면 박씨 장모가 차린 음식을 친부모가 맛있게 드신다. 박씨 부부는 이런 가족형태가 가능한 게 “집안간의 신뢰 덕분”이라고 입을 모은다.

‘가족지도’가 바뀌고 있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는 처가살이를 하는 남성도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친가가 지방인 남성이라면 굳이 처가에 들어가 살지 않더라도 처가 가까이에 살곤 한다. 결혼한 딸들이 친정 주위에 옹기종기 무리지어 모여 사는 모습도 이젠 흔하다. 그러나 당신이 박씨 가족 이야기에 낯설어하거나 거부감을 느낀다고 해서 전국유림회와 정서를 공유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구세대가 아닐 가능성도 높다. 박씨 가족은 아직은 ‘예외적인 경우’일 뿐이다.

현실을 직시하자면, ‘장모시대’는 처가를 좋아하는 사위들의 자발성에 의해 열린 게 아니다. 사위들의 어쩔 수 없는 ‘순응’에 의해 열렸다고 보는 게 현실에 가깝다. 이 기사의 등장인물이 대부분 가명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설령 흔쾌히 처가살이를 하는 남성들이라 해도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누구나 다 아는 비밀 앞에서 다들 딴전을 피우고 있는 형국이다. 사위뿐만 아니라 장모, 사돈까지도 이 시치미떼기의 공범들이다.

노주석(40)씨는, 이 기사에서 드물게 실명이다. 그는 몇 차례 언론보도를 통해 자신의 처가살이를 공개한 ‘용기남’이다. 아내와 두 아들 사진이 함께 나온 적도 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인 ‘다음’의 맞벌이 부부 모임 ‘마주벌이 사랑일기’(맞사일기·cafe.daum.net/doublylove)의 운영자로, 자신의 맞벌이와 처가살이에 대해 잔잔한 감동의 글을 띄운다. 그런 그도 장모와 함께 언론을 탄 적은 없다. ‘노 서방’의 든든한 후원자이면서도, 장모는 정작 얼굴 내밀기를 부담스러워하는 것이다.

‘커밍아웃’ 꺼리는 처가살이 남성들

“회원 가운데 얼추 10% 가까이가 처가살이를 하는 것 같다. 대부분 육아문제 때문이다. 다른 회원들은 이웃집이나 놀이방에도 맡긴다. 물론 친가에 맡기기도 한다. 그러나 친가보다 처가쪽에 맡기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노씨는 “회원들은 ‘맞사일기’에 들어와 이런저런 고충도 얘기하고 정보도 교환하며 맞벌이 생활에 대한 보람을 찾는다”며 “그러나 처가에 아이를 맡기는 남성 회원들은 대부분 ‘어쩔 수 없이’라고 생각하며 외부로 ‘커밍아웃’하는 걸 꺼린다”고 말했다.

처가살이가 앞으로 10%를 넘어 20, 30%대에 이른다 한들, 정작 당사자들이 이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한 ‘장모시대’는 공식 도래하지 않는다. 대신 이같은 ‘비공식성’ 속에서 ‘장모시대’는 당사자들의 개별적인 현실과 일대일로 뒤섞이며 다양하게 변주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버전이 ‘육아를 위한 결합’이다.

처가살이를 하거나 처가 가까이에서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맞벌이이며, 육아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이 가장 크다. 여기에서 옛 속담의 ‘겉보리 서말’은 ‘애 키워줄 사람’으로 대체된다. ‘육아 해결사’로서의 장모는 ‘집안 주인’일지언정 이 시대의 주인공은 아니다. 애도 못 보고 밥도 못 짓는 장인은 뒷방노인일 뿐이다. 그러나 애 보는 장모들에게도 ‘장모시대’는 그저 빛좋은 개살구쯤으로 비칠지 모른다.

일산에 사는 강심자(62·가명) 여사는 얼마 전부터 한집에 살기 시작한 사위가 갈수록 못마땅하다. 평수 큰 아파트로 옮겨 딸네와 합치면서, 강씨는 자신이 꼭 안방을 써야겠다고 고집했다. 이 참에 욕심도 좀 냈다. ‘벽지는 실크로 하고, 싱크대는 어느 제품으로 맞추고, 냉장고와 세탁기는 대형으로 해라, 평면TV를 걸어야 한다….’ 그런데 사위가 베갯머리에서 딸한테 “장모님, 이 참에 분통같은 신혼집 꾸미고 싶은가 보다”라고 한마디 한 게 그만 딸 입을 통해 자신의 귀에 들어오고 말았다.

‘기왕 지들 살림 마련할 거면 좋은 걸로 하라고 한 건데, 그걸 장모 욕심으로 몰아붙여? 그걸 재밌어라 헤헤거리는 딸년은 뭐야? 딸 잘 키워 지한테 줬는데 분통같은 신혼집 좀 꾸며주면 안 되나? 내가 남들처럼 해외여행을 보내달라 하기를 했나, 고급옷을 사달라고 하기를 했나? 만날 악머구리 같은 사내 녀석 둘 뒤치다꺼리하느라 이 나이에 머리에 밥풀 붙이고 사는 내가 한심하지. 남편 정년퇴직하면 우아하게 살 줄 알고 악착같이 애들 키워놨는데, 이건 다 늦게 무슨 놈의 종질이야?’  

여성의 사회진출과 필연적 관계 

한번 미우면 모든 게 미워지는 법. 무슨 놈의 속옷은 컬러로 입어 삶기도 힘들게 하고, 와이셔츠는 왜 매일 내놓는 건지. 노인네가 일주일 내내 아이들에게 치였으면 주말에는 애비가 돼서 데리고 놀러나간든지 해야지 툭하면 집 비우고, 아니면 낮잠이나 자고…. 밥을 많이 먹어도 밉고, 적게 먹어도 밉다. 말하는 태도, 빨래 내놓는 모양, 심지어 화장실 쓴 다음 뒷정리 안 하는 것까지 속을 긁어놓는다. 강 여사는 짜증이 날 때마다 자신이 점점 더 늙어가는 기분이 든다. 그에게 ‘장모시대’는 끝나지 않은 시집살이다.

강 여사의 ‘뺀질이 사위’ 장득남(38·가명)씨도 꿈결 같은 인생은 아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테러사건으로 온 세상이 시끄럽던 날 아침. 화장실 문을 쾅쾅 두드리는 장모의 호통에 볼일을 다 못 보고 급하게 뛰어나와야 했다. 장인이 안방 화장실에 계시는 동안 장모가 급해지셨나 보다. “이건 호러야 호러.” 애 맡기는 보답으로 장모네 생활비 다 대주면서도, 틈만 나면 칠칠치 못하고 되바라진 사위로 대접받는 게 억울하고 분통터진다. 그럴 때마다 고향집 어머니의 모습이 어른거리고, 커리어우먼을 고집하는 아내가 미워진다.

장모가 친어머니를 물리치고 이 시대의 육아 해결사로 떠오른 건 무엇 때문일까. 무엇보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남성과 서울이나 경기도 지역에서 살았던 여성이 결혼하는 경우 육아문제를 대부분 장모에 의지하게 된다. 이 경우 사위뿐 아니라 장모도 ‘어쩔 수 없이’ 현실에 순응한 것이다. 하지만 사위의 친가가 꼭 지방이 아니어도 장모가 아이를 맡는 경우도 많아졌다. 맞벌이 여성이 맘 편하게 아이를 맡길 수 있는 곳은 시댁이 아니라 친정이기 때문이다.

현실에 순응한 경우든 적극적으로 선택한 경우든, 이런 현상은 여성의 권력 강화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 먼저 육아문제는 여성의 활발한 사회진출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보편화하지 않았다면 장모에게 애를 맡길 일도 훨씬 줄었을 것이다. 애를 맡기는 곳이 시댁이 아니라 친정이 된 것도 남편보다는 아내의 처지가 강하게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남편의 처지가 반영된다면 남편의 친가에서 아이를 키울 가능성이 당연히 높을 것이다.

“난 처형들한테 포위돼서 산다”

한평생을 억눌려 살아온 장모들은 자신의 딸만큼은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기꺼이 육아 해결사로 나서기도 한다. “난 전쟁 때 이북에서 피난 내려와 능력없이 살림만 하다 늙었다. 딸들한테는 ‘너희들은 집에 들어앉지 마라’고 가르쳤다.” 한도숙(65·가명) 여사가 딸네 부부와 함께 살며 외손자를 키우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딸이 맘 편하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한 여사는 전문직 여성으로 탄탄대로를 걷고 있는 딸을 통해 가슴 뿌듯한 대리만족을 느낀다.

장모시대의 좀더 확실한 징표는 ‘자매주의’에서 나타난다. 예전 같으면 장가간 아들들이 친가 주위에서 한 생활권을 형성하고 살았지만, 이젠 시집간 자매들이 친정 주위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경우가 많아졌다. 김팔불(36·가명)씨는 친부모를 모시고 산다. 아내가 지방 출신이어서 장인·장모는 모실 수가 없다. 하지만 그의 집에는 일대에 흩어져 사는 그의 누이들이 무시로 드나든다. 애꿎게 시댁 외조카들까지 맡아 키우느라 허리가 휘었던 아내는 얼마 전부터 작정하고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매형들? 늘 누이들 뒤만 졸졸 따른다.

친정이 지방이더라도 서울 사는 딸들끼리 유별난 네트워크를 구성하기도 한다. 신호동(34·가명)씨의 친가는 수도권이다. 남매들도 서울에 산다. 처가는 전라도다. 처갓쪽 자매 다섯이 서울과 수도권에 몰려 산다. 신씨는 지난 3년 동안 택시 기본요금에 조금만 더 얹어주면 되는 누나집에 딱 한번 가봤다. 하지만 처형네 모임에는 한달이 멀다 하고 참석한다. “난 처형들한테 포위돼서 산다.” 신씨는 “친가쪽에서는 내 성격이 워낙 무심해 그러려니 한다”며 “내가 처형네와 잘 어울리는 걸 알게 되면 큰일”이라고 말을 아꼈다.

‘장모시대’의 다양한 변주 가운데 가장 압권은 장모와 딸들의 이중성이다. 당신이 남성이라면 이 기사를 읽는 동안 내내 피해의식만 키웠을지 모른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라.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고 늘 죄송하기만 한’ 친어머니도 누군가의 ‘고약한’ 장모라는 사실을. 늘 ‘안쓰러운’ 누이는 누군가의 ‘무서운’ 아내이자 ‘못된’ 며느리라는 사실도. 물론 누군가의 ‘무심한’ 아들이자 ‘뺀질대는’ 사위인 당신도 이런 관계 속에서 이중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시한부 가족구조의 ‘불안한 동거’

‘뺀질이 사위’를 미워하는 일산 강심자 여사의 이중성을 한번 들여다보자. ‘따로 사는 큰아들 녀석은 명절 때면 차례만 지내고 같은 일산에 사는 처가네로 쏙 가버린다. 다른 도시에 사는 둘째 아들 녀석은 길 막힌다고 또 일찍 떠나버린다. 며느리가 지어주는 밥 얻어먹고 지내도 모자랄 정도로 고생했는데….’ 강 여사는 며느리 친정 근처에 살면서 그 집 식객 노릇하는 큰아들 녀석을 생각하면 속이 터진다. 어쩌다 아들네에 놀러가면 아들은 강 여사의 눈치를 보며 며느리 일을 돕는다. 며느리가 미워 죽겠다.

‘장모시대’가 아직 ‘공공연한 비밀’에 부쳐지는 것은 시대의 주인공들이 안고 있는 이런 이중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처가살이를 하는 사위들은 어떤가. ‘불행 중 다행’인지는 몰라도 사위들의 처가살이는 예의 며느리들의 시집살이에 견주면 맵기는커녕 오히려 달콤하기까지 하다. 아직까지 처가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사위보다는 귀한 손님 대접을 받는 사위가 훨씬 많다. 그런데도 처가살이를 하는 사위들은 장득남씨처럼 대부분 탈출을 꿈꾼다. 대단한 이중성이다.

처가살이는 이처럼 여전히 ‘불안한 동거’다. ‘아이들 클 때까지만’으로 잠정 설정된 시한부 가족구조다. ‘장모시대’가 미완의 시대물로 머문다면 그 원인도 여기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장모시대’의 운명을 쉽게 예단하기는 어렵다. 외할머니 품에서 자란 아이들은 친가보다는 외가를 더 가깝게 느낀다. 미래의 장모는 ‘집안 주인’에서 세대를 아우르는 ‘가족의 지도자’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그건 굳이 한울타리에 살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서울에 사는 박상돈(39·실명)씨의 처가는 경기도 김포다. 장인은 9년 전 돌아가시고, 처가에는 장모가 처제들과 함께 지낸다. 그는 주말이면 거의 빠짐없이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처가를 찾아간다. 평일에도 자주 간다. 찾아가서 삼겹살에 곁들여 소주도 마시고 이런저런 잡담을 늘어놓다가 밤늦게 돌아온다. 박씨는 “자주 가다보니 이젠 아주 생활이 돼버렸다”며 “장모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우리 가족의 ‘취미생활’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맞사일기’ 운영자 노주석씨는 아이들이 다 커도 처가살이를 계속할 작정이다. 힘들여 아이들 키워준 은혜를 두고두고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에게 물었다. “노 선생은 너무 ‘바른생활 사나이’ 아닌가?” 노씨는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노씨는 탈출을 꿈꾸는 사위들에게 다음과 같은 얘기를 던졌다. “난 육아문제 때문에 처가살이를 시작했다. 하지만 나에겐 지금의 가족형태가 현실적이면서도 합리적이라고 본다. 당신들은 관습에 사로잡혀 쓸데없이 고통받고 있는 것 아닌가?”



<기사 후기>
장모시대, 보편적인 그러나 은밀한

스님은 제 머리를 깎지 않는다. 기자도 마찬가지다. 기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기사화하는 건 금기다. 기자의 이해와 직·간접으로 관련돼 있는 내용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이해 당사자는 공정한 문지기(게이트키퍼)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겨레21> 기자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기사로 쓰고 말았다. 추석 특대호인 378호 표지이야기 ‘장모시대’가 바로 금기를 깨뜨린 문제의 기사다.

‘장모시대’는 지난 8월 말부터 일찌감치 추석 특대호 표지이야기로 ‘점지’되었다. 주말 야근을 앞두고 부원들이 모여 식사하는 자리에서 집안 얘기를 나눈 게 ‘화근’이었다. 처가살이를 비롯해 남성기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처가의 ‘세력권’ 안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장모시대’가 이미 지배질서로 자리잡았다는 다소 성급하고 과도한 결론과 함께, 추석 특대호 표지이야기가 결정된 것이다.

기획의 발단은 비록 <한겨레21> 기자들의 집안 이야기에서 비롯되었지만 기사 자체를 기자들의 사연으로 채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장모시대’를 지배질서로 규정한 <한겨레21>의 판단은 빗나가지 않았다. 사례들은 <한겨레21> 바깥에도 얼마든지 널려 있었다. ‘장모시대’의 실태와 가족사회학적 의미 분석. 기획제목도 제법 그럴싸해 보였다. 이제 취재해서 기사만 쓰면 다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취재에 들어가자 미처 예상하지 못한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아무도 ‘커밍아웃’을 하려 들지 않았다. 사진을 찍을 수 없으니 난감한 노릇이었다. 심지어 인터넷에 자신의 처가살이 이야기를 연재하는 사람조차 “장모가 원치 않는다”며 사진찍기를 거부했다. 하는 수 없이 <한겨레21> 안에서 대상자 물색에 들어갔다. 그러나 다들 “내가 나가면 친가와 의절해야 한다”며 손사래를 쳤다.

어찌어찌 <한겨레21> 기자와 가까운 외부 사람을 대상자로 찾아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물론 이 대상자도 ‘협박’과 ‘강요’에 못이겨 응한 경우였다. 이미 보편화한 사회적 현상이 지면에 인쇄되기까지 이토록 힘겨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는 사실 자체가 ‘장모시대’의 숨겨진 본질인지도 모를 일이다. ‘장모시대’는 시치미를 뚝 뗀 채 우리 삶에 넓고도 빠르게 스며들고 있었다.

‘장모시대’는 남성들뿐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거북해 보였다. 많은 여성독자들은 ‘육아 담당자’로서의 장모 위상의 한계를 지적하며 여성의 사회진출에 걸맞은 육아에 대한 사회적·제도적 뒷받침을 요구했다. 남성독자들도 육아책임을 장모에게 떠넘기는 실태를 개탄했지만, 양성평등보다는 효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래저래 우리의 ‘장모시대’는 이중적이거나 매우 복합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