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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MBC엔 어처구니가 살았다

‘어처구니없다’의 어근 ‘어처구니’는 그 어원부터 어처구니없다. 옛사람들은 맷돌의 손잡이를 ‘어처구니’라 불렀다. 맷돌을 돌리려는데 어처구니가 없으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겠는가. 이처럼 기원이나 쓰임, 꼴 등이 사전적 의미와 어우러져 독특한 풍경을 빚어내는 표현이 더러 있다. ‘숲’의 경우 글꼴과 소리가 저절로 숲의 시청각적 이미지를 재현하는 절묘한 기호다. 그러나 ‘숲’도 더는 ‘어처구니’에 필적할 수 없게 됐다. ‘어처구니’는 최근 ‘아이러니의 언어’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라는 오프닝 코멘트로 유명한 앵커 출신 방송사 사장이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사장 자리에서 물러났으니 말이다.

저널리즘에서 ‘어처구니없다’는 그다지 친숙한 표현은 아니다. 무엇보다 객관주의적이지 않다. 그나마 앵커 코멘트이었기에 망정이지, 기자 리포트에서 이런 주관적 표현은 금기다. 물론 객관주의 저널리즘은 그 자체로 진실을 담보하지 못할 뿐더러, 오히려 진실에의 접근을 방해하는 ‘신화’로 작동하곤 한다. 이에 견줘 “어처구니없다”라는 앵커 코멘트는 개념화의 공정을 전혀 거치지 않았음에도, 아니 오히려 그러했기에, 상식을 배반한 사태에 대해 더욱 보편적인 반감을 불러일으켰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처구니없다’에 관한 한 가장 탁월한 저널리즘적 용례를 제시했던 그 앵커 출신 사장이 정권에서 파견한 참주들(방송문화진흥회 여당 추천 이사들)로부터 어처구니없는 능욕을 당하고 물러난 아이러니에는 ‘어처구니없다’의 저널리즘적 한계가 숨어 있다. ‘어처구니없다’는 사태의 맥락성에 충분히 눈길을 보내지 않는다. 신음 또는 탄식에 가까운 이 발화(發話)는 휘발성이 매우 강하다. 이성적 사유와 정서적 공명, 이에 따른 실천으로의 확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여기서 “어처구니없다”는 이슈 사이를 부유하며 스펙터클만 전시하는 방송 저널리즘의 자기고백이기도 하다.

언론 자유에 대한 위협은 민주주의 근간에 대한 위협이다. 앵커 출신 방송사 사장은 자신에게 가해진 저열한 압력을 어떻게 풀이했을까? 개인이나 방송사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였을 수 있지만, 공영방송과 언론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도 받아들였기를 바란다. 그러나 사유와 공명과 실천에 관한 ‘어처구니없다’의 한계는 다시금 명확하다. 그가 당했을 숱한 협박과 회유에 대해 제대로 입을 열지 않고 있는 것이나 36년 동안 몸담았던 방송사를 떠나며 “MBC 파이팅”을 외치고 만 것을 보면 그의 싸움이 ‘애사심’에 머문 것은 아니었는지 회의가 든다. MBC를 또 하나의 방송 기업으로만 보는 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 <한국방송대학보> 제 1573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