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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바보야, 문제는 ‘공정성’이야!

저널리즘에서 ‘아’와 ‘어’의 차이 사유하기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은 표면적으로 모음 한 획이 좌우 대칭일 뿐이지만, 저널리즘에서는 본질적인 사유를 요구한다. ‘아’와 ‘어’는 표상되는 대상이 다른 게 아니라, 그 대상을 표상하는 질감이 다른 것이다. 저널리즘에서는 뉘앙스의 차이일 수도 있고, 맥락의 차이일 수도 있다. 굶주림에 지친 장발장이 빵을 훔쳤을 때, 이를 보도하는 기자들 사이에 절도 행위와 관련한 육하원칙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러나 하나의 서사를 구성하는 이 여섯 가지의 요소 가운데 무엇을 눈여겨보고 강조하느냐에 따라 장발장이라는 존재의 사회적 평판은 하늘과 땅 차이가 된다.

저널리즘에서 객관성과 공정성은 흔히 하나의 짝으로 인식되고, 심지어 구분 없이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객관성과 공정성은 ‘아’와 ‘어’보다도 차이가 크다. 진화론적으로 말하면 객관성과 공정성은 상동기관이 아니라 상사기관이다. 고래와 말처럼 겉모양이 멀어도 기원은 가까운 게 아니라, 독수리와 박쥐마냥 도무지 조상이 닿지 않는다는 얘기다. 객관성은 형식의 규범이고, 공정성은 내용의 규범이다. 객관성은 형식을 빌려 대상과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려는 것이고, 공정성은 왜곡 없이 진실에 다가가려는 것이다. 그 멀어지려는 지향과 다가가려는 지향으로 둘은 상호 길항적인 이항대립의 긴장 위에 놓인다.


방송 기자가 비행기를 타고 ‘강요된 재앙’의 현장 아이티로 날아갔다. 그곳에서 구호 활동을 벌이던 119 구조대원과, 그들의 뒤를 보살펴야 하는 대사는 방송 기자 앞에서 각자의 얘기를 했다. 기자가 옮긴 각자의 말의 일부분은 적어도 파편적 사실로서 객관적이다. 그러나 그 파편적 사실이 몽타주라는 편집 기술과 만나면서, 어느 한쪽은 헌신을 하고도 천대받는 무구한 존재로, 다른 한쪽은 참극의 현장에서 국록으로 회의호식하며 타인의 숭고한 행위를 조롱하는 파렴치한으로 재현되었다. ‘아’와 ‘어’는 그렇게 달랐다.

공정성을 사유하게 하는 또 하나의 일화는 최근 청와대에서 연출됐다. 방송 기자 출신인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해 “연내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본다”고 했던 말을 “연내라도 안 만날 이유가 없다”로 옮겼다. 논란이 불거진 뒤 청와대 쪽에서 내놓은 해명은 ‘개떡 같이 말한 것을 찰떡 같이 알아듣고’ 옮겼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 역시 뉘앙스와 맥락으로 타당성을 따져봐야 한다. 이를테면 지금은 고인이 된 직전 대통령이 “대통령 못해먹겠다”고 한 푸념을 대통령의 하야 의사 표명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이 경우는 어떤가?

몽타주 장난질보다 더 나쁜 건 파편적 사실조차 왜곡하는 것이다. 그것이 대통령의 말씀이고, 푸념이 아니라 한반도의 미래와 관련해 외신 앞에서 정색하고 했던 말이라면 더욱 그렇다.

※ <한국방송대학보> 제1572호(2010-02-08)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