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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벅지 긁다 떠오른 생각

방송사 앞의 정반대 두 목소리

지금 서울 여의도 두 방송사 앞은 연일 집회로 북적댑니다.
(너무나 조용한 또 하나의 방송사 구성원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소외를 극복하고 존재감을 부각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듯합니다^^)
집회로 '몸살을 앓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아 굳이 '북적댄다'고 표현해 봤습니다.
여론을 모으고 전파하는 방송사 앞에 여론의 오프라인 경합장이 서는 게 자연스럽지 않나 해섭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이들 방송사 앞에는 정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집회가 맞붙고 있습니다.
언론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건 자연스럽다 치더라도, 정반대의 목소리(특히 어느 한쪽은 다른 한쪽을 잡아먹을 듯하고 있죠)가 대치하는 건 매우 드문 일일 겁니다.
'동시에 떴다'기보다는 한쪽이 하는 걸 보고 다른 쪽이 맞불을 놓은 것인데, 당연히 주장하는 내용은 엇갈리거나 부딪치겠지만, 집회 형식은 그저 부딪치는 정도가 아니라 심각한 비대칭입니다.
가스통 집회하시는 그분들 모습을 보면 '내용과 형식의 완벽한 조화'라는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이죠.
촛불집회하시는 분들은 '비폭력-불복종'이라는 간디의 형용모순적 실천방식과 빼닮았고요.

문득 두 집회의 차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궁금해졌습니다.
정치적 견해에 따라 각각을 선과 악으로 대립시켜 보는 거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요.
하지만 어느 쪽 집회가 '언론의 자유' 정신과 부합하는지, 또는 '집회의 자유' '표현의 자유'에 호응하는지 살펴보는 건 만만찮은 품이 들 것 같습니다.
왜 굳이 그런 걸 궁금해하는지, 궁금해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렇습니다.
진보든 보수든(보수를 참칭하는 폭력집단은 빼고) 정치적 견해를 넘어서서 집회의 정당성 여부에 동의할 수 있는 논리의 틀을 만들어보자는 것입니다.

거칠게 정리하면 이럴 것 같습니다.
언론의 자유든 집회의 자유든 표현의 자유든, 모든 자유는 타인의 자유 앞에서 멈춰서야만 정당성을 갖습니다.  
둘 중 어느 한쪽이라도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억압하는 행태를 보이는지 살펴보면 되겠네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억압하는 쪽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여러 자유의 논리가 부메랑이 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그들의 주장 내용이 '언론사의 자유'(굳이 이렇게 표현하는 이유는 언론의 자유는 모두의 것이고, 그 하위 개념으로 언.론.사.의 자유가 배치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의 특수성과 어떻게 관계맺는지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언론사는 모두에게 예외없이 개방적이어야 하면서도 동시에 어느 누구로부터도 침해받아서는 안 되는 이중적 위상을 갖고 있습니다.
언론에 있어서 이른바 '~로부터의 자유'는 일상적으로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게 현실입니다.
따라서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집회가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부정하는 내용을 띠고 있으면 안 되겠지요.
어느 쪽이 그러는지, 또 어느 쪽이 이런 자유를 옹호하는 것 자체를 집회 이슈로 삼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언론사의 자유'와 관련해 정치권력이나 자본권력으로부터의 자유와는 사뭇 다른 성격의 관계가 있으니, 바로 소비자(독자 또는 시청자)와의 관계입니다.
조중동 광고주에 대한 압력이 불법이네 어쩌네 하는 터무니없는 논리가 일부에서 유포되고 있지만, 이는 소비자운동으로서 정치적 정당성을 갖습니다.
말하자면, 정치권력 및 자본권력의 억압을 주장하지만 않는다면 어느 쪽 집회든 언론사의 콘텐츠와 관련한 주장은 자유의 장에서 경합할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주장 역시 폭력에 의존하는 방식이어선 안 되겠죠. 폭력은 그 어느 경우에도 언론자유의 적입니다. 심지어 폭력 행사의 주체에게도.

이 정도의 논거로 기사를 써볼까 합니다.
혹 모자라거나 넘치는 부분이 있으면, 나아가 도무지 방향을 잘못 잡았다고 보이면 아프게 지적해 주십시오.

여불비례.  

(2008. 6.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