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 언론’은 재앙이다
“지금 학우들이 경찰에 쫓기고 있습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언론사에 갓 입사한 수습기자들이 시위현장에서 선배에게 보고할 때 실제로 저지르는 드문 실수다. 무엇이 실수일까? ‘학우’라는 표현이다. 그는 ‘객관적 관찰자’로서 쓰지 말아야 할 주관적 표현을 썼다. 공정성이 내용과 관련된 규범이라면 객관성은 형식과 관련된 규범이다. 설령 경찰에 쫓기는 학우들이 안쓰럽더라도 꼭 ‘학생’이라고 부르는 것, 이것이 객관성 규범이다. 객관성은 한마디로 ‘티 내지 않기’다.
▲ 조선일보 3월6일치 ‘뉴스 & 뷰’
신문 1면은 사람으로 치면 얼굴이다. 사람 얼굴이 직립보행의 집적된 산물이듯이 신문 1면도 자연선택(도태)의 과정을 거치며 진화해왔다. 최근 10년 동안 나타난 두드러진 변화로는 기사 꼭지수가 줄어든 것을 꼽을 수 있다. 그러면서 단신기사가 거의 사라졌다. 대신 분석이나 해설기사가 1면으로 자주 진출하기 시작했다. 매체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신문이 정보보다는 분석을 중시하는 쪽으로 이미지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 <조선일보> 1면에 매우 급격한 변화가 나타났다. 지난 6일부터 매일 실리고 있는 ‘뉴스 & 뷰’가 그것이다. 제목은 ‘정보와 관점의 결합’을 암시한다. 조선일보는 “시니어 기자들이 쓰는 심층 분석과 해설”이라고 설명한다. 분석과 해설은 모든 신문들의 화두이니, 그것만으로 급격하다고 할 수는 없다. 문제는 실제 내용이다. “사회적 논의기구는 여야 정치권의 ‘무능’과 ‘비겁’이 어우러져 나온 산물이다”(6일치 ‘한나라 171석 버거웠나…’)를 보라.
이 문장은 기존 규범대로라면 “… 산물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같은 ‘전언’ 방식으로 가야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 그래서 여당은 부담스러운 논전(論戰)을 사회적 논의기구에 맡기고 자신들은 그 뒤에 숨어 지켜보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 문장은 아예 ‘직접 인용’ 방식을 써야 했다. 물론 기존 규범에 비춰 그렇고, 규범은 변할 수 있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자연(독자) 선택’을 받느냐 못 받느냐는 별개의 문제지만.
다만 나는 이 사설 같은 기사에서 인간의 언어적 혼란을 다룬 구약 창세기 바벨탑 이야기가 ‘주관적’으로 연상될 뿐이다. 언론이 소통의 장애물이 되는 건 무서운 재앙이다.
※ 이 글은 <한국방송대학보> 1532호 ‘미디어 바로보기’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