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발표글

사라지지 않는 마약, 테러리즘!

불평등 환경 위에서 자라는 독버섯… 지구촌 전체가 증오할 테러는 없는가

9·11 테러 직후, <한겨레21> 377호에 썼던 테러리즘 관련 기사입니다. 요즘 ‘용산 도심테러’ ‘국회 테러’ 등 정치권력과 조중동에 의한 테러리즘 언어 오남용이 심각한 지경이어서 옛 글을 다시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테러리즘 언어 오남용은 그 자체로 테러리즘입니다.




2001년 9월11일 오전 7시30분 미국 보스턴 로건공항. 위조여권과 흉기를 소지한 한 아랍인이 로스앤젤레스(LA)행 항공기에 오른다. 항공기가 이륙하자 그는 흉기를 꺼내들고 ‘동지’ 몇 사람과 함께 항공기를 납치한다. 조종간을 잡은 그의 눈에 곧 자유의 여신상과 맨해튼의 마천루가 들어온다. 그저 높다고만 느껴지던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괴물처럼 거대하게 다가온다. 조종실 앞유리 너머로 빌딩 외벽만이 가득 눈에 찬다. 눈을 감고 “알라”를 외치는 순간, 거대한 폭음이 들려온다.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테러리즘, 학문적 정의만 100가지

세계무역센터를 향해 항공기를 돌진시킨 아랍인들은 테러리즘 연구서에 ‘상상의 한계를 뛰어넘은 테러리스트’로 이름을 올릴 것이다. 무고한 수천∼수만명의 인명에 무차별 테러를 가한 행위는 테러리즘에 대한 현실적 경험은 물론 영화적 상상력까지 뛰어넘는 극악무도한 것이었다. 항공기가 빌딩에 처박히는 장면을 보며 잠시나마 할리우드영화의 익숙한 스펙터클을 떠올렸던 사람들도 100층 높이에서 하릴없이 추락하는 생명들 앞에서 얼마나 치를 떨어야 했던가.

하지만 서방언론들이 테러리즘 사상 최악이라고 규정한 이번 사태에 대해 모든 지구촌 주민들이 가슴 아파한 것은 아니다. 드물지만 예외가 있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에서는 애도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기쁨에 겨운 수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허공에 테러를 축하하는 총을 쏘고 춤을 추며 환호하는 모습이 외신을 타고 전해져왔을 뿐이다.

지구촌 전체가 증오할 수 있는 테러리즘은 없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테러리즘 전문가들의 대답은 하나같이 “그렇다”이다. 물론 지구촌 전체가 기뻐할 수 있는 테러리즘이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지구촌 전체가 테러리즘이라고 동의할 수 있는 사건 자체가 절대 존재할 수 없다. 같은 사건을 두고 한쪽에선 테러리즘이라고 부를 때 반드시 어느 한쪽에선 ‘성스러운 투쟁’으로 부른다.

학문분야라고 해서 사정은 다르지 않다. “학문적 정의만 무려 100가지가 넘는다. 1970년대 슈미트라는 독일학자 등이 이런 모든 정의를 아우르는 완벽한 정의 내리기를 시도한 적이 있다. 무려 한 페이지에 이르는 장문이었다. 슈미트는 이 편지를 전세계 테러리즘 연구자들에게 보내 동의를 구했다. 그런데 부분동의만 있었을 뿐 전체에 동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국테러리즘연구소 최진태 소장은 “정의를 합의하기 위한 시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앞으로도 쉽게 합의가 이뤄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테러리즘에 대한 정의가 이처럼 제각각인 건 무엇보다 테러리즘 자체의 속성이 대단히 복잡하기 때문이다. 관점에 따라 정의도 달라진다. 연구자들의 관점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세력의 이해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최 소장은 “테러리즘의 속성은 다면성보다는 상대성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아무리 가치중립적으로 정의하려 해도 테러리즘을 ‘절대악’으로 보는 시각과 ‘필요악’으로 보는 시각이 미묘하게 갈린다는 것이다.

다만 대부분 학자들 사이에서 최소공배수로 공유되는 테러리즘의 구성요소는 없지 않다. 첫째 정치적 목적이나 동기가 있고, 둘째 폭력 또는 폭력 사용에 대한 위협이 수반되고, 셋째 조직적인 사전준비가 있으며, 넷째 심리적 충격과 공포심을 일으키는 것 등이다. 이를 토대로 테러리즘을 정의하면 ‘주권국가 또는 특정단체가 정치·사회·종교·민족적 목표달성을 위해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폭력의 사용 또는 이에 대한 협박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특정 개인·단체·공동체·정부의 인식과 정책변화를 유도하는 상징적·심리적 폭력행위’이다.


가치중립적인 테러리즘은 없다

미국에서의 테러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 엄청난 충격이지만, 안타깝게도 테러리즘의 정의를 ‘가치중립적’으로 대입할 때 우리의 안중근 의사도 테러리스트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폭력’을 사용하는 ‘대한의군’이라는 특정단체의 고위간부로서 이토에 대한 개인적 보복 차원이 아닌 일본제국주의에 ‘심리적 충격’을 가해 조선병참을 저지하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했다. 가치중립을 지키기 위해 테러리스트 안중근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가치중립을 버리면서라도 독립투사 안중근을 지켜내야 할 것인가.

‘의사’ 안중근은 의심할 여지없는 독립투사다. 적어도 우리 국민들은 독립운동 하면 유관순 열사 다음으로 그의 이름을 떠올린다. 그러나 예외는 있다. 천주교 신자였던 그가 정작 천주교로부터 공식 인정받은 건 2000년의 일이다. ‘하얼빈 거사’ 뒤 파문당해 90여년 만에 이뤄진 복권이었다. 그동안 그는 종교적으로 ‘살인자’였을 뿐이다. 놀랄 일은 이것만이 아니다. 김구 선생과 이봉창 열사는 서양의 테러리즘 연구서에 ‘테러리스트’로 기록돼 있다.

이런 고민을 이번 미국 사태를 바라보는 아랍인들의 처지에 그대로 적용하는 건 무리인지 모른다. 설령 두 사건을 같은 테러리즘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해도, 너무나 큰 질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무고한 일반인을 무더기로 희생시키는 거대한 무차별적 폭력에서 어떤 숭고한 가치를 찾기는 불가능해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면, 두 사건의 질적 차이를 찾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최근 들어 테러리즘의 발생 빈도는 크게 줄어드는 반면 테러에 의한 희생자 수는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왜 나타나는 것일까. 80년대 들어 국가가 테러단체를 배후에서 지원하거나 조장하는 국가테러리즘이 등장하고 무기체계가 갈수록 고성능화하면서 테러리즘도 대형화하고 있다. 정보통신의 급속한 발달도 이런 현상을 거들었다. 그러나 좀더 근본적인 원인은 테러리즘이 대형화로 가는 속성을 가진데 있다.

누가 왜 테러리스트가 되는가

“70년대에는 항공기를 납치만 하면 전세계적 관심을 끌었다. 납치범들은 굳이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자신의 주장을 널리, 그리고 강력하게 알리며 세상에 심리적 충격을 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렇게 해서는 언론부터 큰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한국테러리즘연구소 최진태 소장은 “테러리즘은 마약처럼 강한 내성과 중독성이 있다”며 “한 사람의 희생으로 목적달성이 가능하던 것이 열 사람의 희생으로도 불가능해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스라엘 선수 9명의 희생자를 낸 1972년 뮌헨올림픽 테러사건은 당시만 해도 끔찍한 사건이었다. 그들 가운데 최초 희생자는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진 것이었고, 애초 인질 살해 의도가 없었던 검은 9월단은 그제서야 8명을 살해했다. 사건의 장본인인 ‘검은 9월단’은 그것만으로도 전세계에 악명을 떨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정도로 해서는 어림도 없다. 최 소장은 “테러리즘은 목적달성을 위해 갈수록 피해규모와 상징성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찾아가게 된다”고 덧붙였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보자면 미국에서 일어난 비극은 역설적으로 테러를 모의한 쪽에서는 효과를 극대화했다고 볼 수 있다. 부시 미국 대통령은 “그들이 무너뜨린 건 커다란 빌딩일 뿐”이라고 깎아내렸지만, 정작 미국이 상처받은 건 1등 국가의 자존심이었다. 사상 최대의 피해규모뿐 아니라 세계 유일 초강대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의 상징물만을 골라 가장 충격적인 방식으로 상황을 연출해낸 것이다. 전세계 공중파 방송이 24시간 이상 특별방송을 편성한 건 당연한 결과였다. 안중근 의사가 90여년 만에 다시 나온다면 어떤 전술을 취할까. 윤봉길 의사는 예의 도시락 폭탄을 계속 고집할까.

확실한 건 예나 지금이나 누군가는 테러리스트를 꿈꾸고, 또 그중 일부는 끝내 테러리스트의 길을 간다는 사실이다. 누가, 왜 테러리스트가 되는 것일까. 테러리즘 연구자들 가운데는 테러리스트의 심리와 정신병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테러리스트는 정상인과는 다른 심리구조를 가진 사람들이다. 마르골린, 마우러, 벨로프 세 사람도 그런 방법을 통해 테러리스트의 특징을 분석하려고 시도한 학자들이다.

이들은 테러리스트의 특징을 어린 시절 강렬한 증오심이나 울분 또는 복수심을 체험한 사람이거나, 지배욕이 강하고 공격성·침략성 등 동물심리적 요소가 강한 사람, 어린 시절 과도한 희망이나 약속 또는 자신감이 단절되어 나르시시즘에 빠진 사람, 정신불안적 성향이 강한 사람 등으로 분석한다. 심지어 여성 테러리스트들은 성을 깊이 갈망하거나 폭력과 광란적 성에서 희열을 찾는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는 성차별적 주장까지 한다.

그러나 이들의 연구가 얼마나 실증적인 것인지 의문이 들게 하는 다른 연구결과들도 있다. 러셀과 밀러 교수가 1977년 팔레스타인, 일본, 독일, 이란, 터키 등 전세계 테러리스트 350명을 조사한 결과, 그들의 3분의 2 이상이 중산층 또는 상류층에 속했다. 또 반수 이상의 부모들이 전문직, 정부 관리, 외교관, 군 장교, 목사 등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대학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고 상당수는 대학원이나 전문교육을 받았으며, 특히 지도층의 직업은 엔지니어, 의사, 변호사, 언론인, 경제학자 등으로 다양했다.

테러리스트를 꿈꾸는 사람은 사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군사정권 시절 그들 일파를 날려보내면 어떨까 꿈꿔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아니, 어릴 적 감히 대적하지 못할 덩치 큰 아이에게 멋진 한방을 날리는 꿈을 꿔보지 않은 소심한 아이는 몇이나 될까. 노동현장에서도 구사대 폭력, 백골단의 역테러로 신음하며 어릴 적 꿈을 다시 꿔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한 30대 노동운동가는 “더러는 적군파를 연구하기도 하고 더러는 사제폭탄 제조에 몰두하기도 했던” 80년대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는 “80년대 중반 이후 사상이론의 정립과 대중운동의 급격한 확산으로 ‘테러리즘의 꿈’은 일장춘몽이 됐다. 말없는 대중이 철없는 활동가들을 구제했다”고 회고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테러리즘의 꿈과 영원히 고별한 것일까. “90년대를 지나면서 운동의 저변이 확대된 반면 이제는 운동권의 분열상이 돋보인다. 문민정부니 국민의 정부니 하는 것들에 대한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는 ‘역시나’로 끝나가고….” 그는 “이럴 때 또 어디에선가 테러리즘을 꿈꾸는 새로운 ‘아이들’이 생겨나지는 않을까”라고 되물었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꿈속의 테러리즘이 현실세계로 걸어나오는 경우는 흔치 않다. 다행히 수많은 테러리즘은 까다로운 정치·사회·심리·기술적 요건들이 완벽히 채워지지 않는 한, 쉽게 백일몽으로 사산하고 만다. 그중 극히 일부만이 끝내 테러리즘을 감행한다. 이 소수의 현실 테러리스트는 어떤 필연적 특징을 갖고 있을까. 기득권세력의 백색테러나 강대국의 보복테러가 아니라면 테러는 본질적으로 강자에 대한 약자의 공격행위다.

한 아마추어 연구자는 테러리즘을 “약자가 강자에게 행하는 발악적 혹은 감정적 저항”이라고 주장한다. 대중운동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테러리즘이라는 극단적 모험주의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아무나 발악하지는 않는다. 정치적·종교적·민족적 신념에 대한 현실적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선택하는 마지막 전술. 목숨까지 던져가며 테러를 감행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는 꽤 유용한 개념인 듯하다. 테러리즘이 그나마 난무하지 않는 건 이처럼 테러리즘에 내재하고 있는 자기안전장치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테러리즘의 폭력성이 인류가 인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번 사태 직후 미국에 의해 테러지원국이나 불량국가로 지정된 국가들도 일제히 테러를 비난하는 성명을 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는 미국인 부상자를 위해 헌혈까지 했다. 적어도 테러리즘에 대해서는 지구촌 전체가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노선을 지지하는 듯하다. 이제 테러리즘은 자신의 비대해진 몸집 때문에 전에 없는 환경을 맞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하지만 미국의 강력한 응전이나 지구촌 전체의 반테러리즘 결의로 이른 시간 안에 테러리즘이 사라질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연구자들 사이에 유일하게 일치하는 견해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테러리즘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테러리즘연구소 최진태 소장은 “테러리즘이 존재하는 구조적 원인은 바로 불평등”이라며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정확한 응징은 있어야 하겠지만 무차별적 보복은 더 큰 테러리즘을 부를 뿐”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미국을 비롯해 진정 테러리즘을 미워하는 국가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지구촌의 정치적·경제적·종교적 불평등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테러리스트가 유전적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환경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말이다.